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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 마음 맑음 Aug 29. 2023

안일한 경찰의 대응

집에 들어와 차분하게 다시 경찰과 대화를 했다.


경찰: "아직 밖에 남자가 있나요?"

나: (커튼 사이로 창문 밖을 조심히 둘러보며) "아니요, 지금은 그 자리에 없는 것 같아요."


경찰: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나요?"

나: (너무 당황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며, 아직도 두려움에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아, 그 사람 얼굴 동영상이나 사진이라도 찍어놓을 걸 그랬어요."라고 말하며 '내가 왜 그때는 그 생각을 못했지?'라고 나를 자책하고 있었다.

경찰: "그러게요, 사진이나 영상이라도 찍어 놓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인상착의를 알아야 수사가 가능하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병신 같은 대화인 것이다. 이건 피해자가 자책할 일이 아니라, 그런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피의자의 동영상이나 사진을 찍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게 일반적으로 정상이다. 주변 CCTV 영상을 파헤쳐서 피의자를 수색하는 것은 경찰이 할 일이다. 설사 피해자가 범인의 인상착의를 말한다 해도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기보다, 두려움이나 당황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혀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피해자의 진술을 포함해서 주변 CCTV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경찰이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집 입구 앞으로 나가 주변 길을 두루 살폈다. 확실히 남자는 사라지고 난 후였다. 집으로 후다닥 다시 올라가 침착하려 노력했다. 우리 집 위치를 알려준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또 오면 어떡하지? 반복되는 스토킹이면 어떡하지? 혹시 다음에 칼이나 무기 같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순간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라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밖에 나가기가 무서워졌고, 갑자기 더 이상 혼자서 집 앞에도 못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평온했던 우리 동네 길거리가 순식간에 온통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니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사건이 있고  5시간 정도 후, 경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깐 집 앞으로 나와보라고 해서 나갔더니 주말이라 사고가 많아서 이제야 와볼 수 있었다며, 피의자 인상착의를 물었다. 최대한 차분하게 인상착의를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비가 오고 있어서 나도 우산을 쓰고, 남자도 우산을 쓰고 있어서 정확히 잘 보이지는 않았다. 최대한 기억해 보자면, 청색 모자를 눌러쓰고 어두운 색 잠바를 대충 걸친 듯한 편한 옷차림이나, 동네를 어슬렁 거리는 느낌이나, 우리 집 골목을 포함해서 이 동네 길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편의점 위쪽 길에서 걸어서 시내 쪽으로 어슬렁 거리며 천천히 걸어가는 행동 등을 보면 이쪽 동네 사는 사람이거나, 동네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일 것이라 예측된다. 즉, 가까운 곳에 살며 계속 마주치거나 반복적인 스토킹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피해자로서 불안감과 공포심이 들 수밖에 없고, 마음 편안하게 동네에서 살아가기 힘들다. 나보다 키가 조금 작은 정도로 키는 168cm 정도, 청색 야구 모자, 검은색 점퍼, 어두운 청색 바지, 4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고, 얼굴과 몸이 말랐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느낌이었다. 목소리는 얇고 하이톤에 얍삽한 느낌이 들었다. 상당히 강한 말투로 수차례 강하게 거부의사를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따라오고, 진로를 방해하며, 집 앞에서 기다리며 저를 지켜보는 행위를 봤을 때, 처음이 아니라 상습범이라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라고 진술했다.


메모를 하던 경찰은, "다음에 그 남자가 또 나타나면 바로 경찰서에 전화를 주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네? 아,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불안에 떨고 있어 집 밖에도 못 나갈 것 같은 나에게 경찰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 인상착의는 있으나 사진이나 CCTV 영상이 없으니 피의자를 수사할 수 없다는 식의 말은 무슨 개똥 같은 말이지? 스토커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내가 경찰서에 전화를 주면 그 자리에서 잡겠다는 말은 또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아직 나에게 직접적인 신체적 피해를 가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경찰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은, 그럼 내가 실질적으로 신체적 피해를 당해야만 정식 수사와 피해자 보호 조치를 해주겠단 말인가? 스토커가 앞에 또 나타나야만 경찰이 피의자를 수색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나는 스토커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 매일 불안에 떨며 스토커를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일까? 황당하고, 막막하고, 지구에 홀로 남은 듯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뭐지? 정식으로 신고를 했는데 진술서 같은 거 안 쓰나? 피의자를 찾아 경고나 조치를 할 시도조차 안 하고 아예 수사를 안 하겠다는 말인가? 내가 분명 피해자이고, 피의자는 내 집이 어딘지 알고, 정황상 충분히 추가 피해가 날 수 있는 상황이고, 내가 경찰에 신고한 것을 봤으니 보복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나를 지켜주지 않는 건가? 나는 아무런 보호를 받을 명분이 없다는 것인가? 내가 당하고 싶어서 당한 게 아닌데, 오로지 개인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인가? 이미 일어난 1차 피해와 앞으로 더 있을 수 있는 피해를 오로지 개인의 힘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오히려 경찰의 대응을 마주한 후, 더 큰 피해를 당해도 그 어떤 보호나 조치도 국가로부터 받을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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