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음 Dec 11. 2020

아빠의 육아 반성문

스스로도 아픈지 몰랐던 칭찬의 단맛

아들의 첫 시험


아들의 첫 시험은 무척이나 떨리는 경험이었다. 코로나로 중국 생활을 잠시 중단한 처제는 아들에게 세계 최고의 한자 교사가 되어주었고, 덕분에 흥미를 붙인 아이는 폭발적인 학습을 이루어냈다. 그러더니 본인 스스로 한자 자격증 시험을 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여섯 살 아이에게 ‘고사장’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느껴질까.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시험장에서도 정작 아이는 별로 긴장한 모습이 아니었다. 이윽고 녀석은 배시시 웃으며 고사장을 걸어나왔다. 녀석이 고작 네 살 때, 손을 흔들고 출국장에 들어갈 때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제는 그보다 훌쩍 더 성장해있는 아들은 수능 보는 형, 누나들마냥 두꺼운 파카를 입고 있었다. 걱정스레 바라보는 부모와 그보다 더 떨려했던 이모를 향해 ‘식은 죽 먹는 것보다 더 쉬웠다’며 녀석은 너스레를 떤다.


여섯 살 아이에게 ‘고사장’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느껴질까.



집에 도착한 아이는 이제는 한 급수 더 높은 시험을 보고 싶다고 했다. 한자 급수 시험은 각 급수마다 익혀야 하는 한자의 수가 정해져 있다. 한 단계 더 높은 시험을 보러 간다면 자기보다 몇 살씩은 더 많은 형, 누나들과 함께 시험을 보게 될 터였다. 하지만 녀석의 눈망울에는 성취감과 자신감이 가득 서려있었다.


아빠의 칭찬


나는 녀석의 그런 모습이 좋았다. 주변의 것들을 그저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지적 호기심과 새롭게 해석해내는 창의력, 어떻게든 성취해내고 마는 끈기가 있었다. 아내의 육아는 늘 열려있었다. 아이가 평범하지 않은 생각을 해낼 때, 틀에 맞추려고 노력하기보다 진심으로 같이 기뻐해 주고 그 생각을 확장시켜주었던 엄마 덕분에 아이는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주어진 것 안에서 사고하는 나로서는 하기 힘들었던 부분이었다보니 육아에 있어서 후방으로 빠지기 쉬웠고, 아이가 어떤 성취를 할 때마다 노력하지 않은 열매를 맛보는 것 같은 미안함과 머쓱함이 자주 들곤 했었다. 그리고 늘 그 자리에서 꿋꿋하고 기쁘게 아이들을 키워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끼곤 했다.

어른들도 떨려서 시험장에 가면 알았던 것도 놓치게 마련인데,
 아들이 정말 훌륭하게 잘 해냈구나!



칭찬의 단맛


나는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건강하게 자라주고, 평범하게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녀석은 아무리 보아도 그 이상의 성취를 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고 있었고, 어른들과 소통하는데도 전혀 무리가 없을만큼 특히 언어적인 부분이 크게 발달해있었다.


“아니 이걸 벌써 이렇게 잘 해요?”

“아이가 어려울텐데도 엄청 잘 하더라고요."


곁에서 아이를 경험한 사람들의 입에서도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것을 보며 나는 아빠로서 흐뭇함을 느끼곤 했다.

아이를 칭찬해주고픈마음에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 앞에서 아이를 향한 칭찬으로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지난주에 우리 영원이가 벌써 이런걸 해냈어요. 열심히 노력해서 해낸 것을 축하해주세요."

 

그런 칭찬과 인정이 아이를 병들게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아내는 아이의 성취보다 아이의 존재 자체에 더 집중하자는 시그널을 자주 보내곤 했다. 나는 이론적으로는 동의했지만 그보다 아이가 이루어내는 성취가 참 달고 오묘했던 것 같다. 그 성취에 몸짓과 표정이 먼저 반응했다. 그리고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듯, 그러한 강화(reinforcement)는 아이의 일취월장에 촉매가 되어주었다.

그보다 아이가 이루어내는 성취가 참 달고 오묘했던 것 같다.



칭찬을 줄이셔야 할 것 같네요


문득 청천벽력과 같은 음성이 들려온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존경하는 분들의 가정에 초대되어 식사를 하는데 아들에게는 아이에게 맞는 사이즈의 식기가 주어졌다. 아들은 어른들과 같은 사이즈의 식기를 제공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교육에 지혜가 있으신 사모님께서는 금새 아이가 ‘어른스럽다는 것’에 대해 칭찬을 받아온 것을 알아차리신 듯 했다. 사모님은 아이의 요청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들은 어른들과 같은 사이즈의 식기를 제공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영원이는 아이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수저가 주어지는 것은 더 커서는 받을 수 없는 특권이자 배려야. 너는 그것을 스스로 버리려고 하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거야."


자존심이 상한 아이는 자신의 나이가 비록 여섯 살이지만 어른 못지 않은 성취를 해내고 있음을 은근히 대화 중에 드러냈다. 그런데 사모님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보통 그런 이야기를 하면 ‘대단하다’라는 반응이 나오게 마련인데 사모님은 그런 아이의 자랑거리에 완전히 무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들보다는 오히려 한 발 물러나 어린이용 식기를 받아들이기로 한 아이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셨다.


“아이 아빠가 아이에 대한 칭찬을 줄이셔야 할 것 같네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십년전 나 역시 아들처럼 조그만 그릇에 밥을 받는 것을 싫어했다. 형, 누나들과 똑같은 그릇에 밥을 달라고 열을 내던 1989년의 내가 떠올랐다. 열 다섯 살, 열 세 살, 열 한 살 차이가 나는 남매들 속에 늦둥이로 자란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어리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 누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노력했고, 퍽이나 어른 같은 태도와 말투를 갖추게 되었었다. 그에 대해서라면 집안 식구들 뿐 아니라 어디를 가든 칭찬이 쏟아지곤 했다. 가끔씩 ‘애늙은이’ 같다며 나에게 천진난만함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하시는 어른들도 있었지만 나에게 딱히 심각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이게 문제였는지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부모는 조금은 무채색이 되면 어떨까. 아이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자기 스스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칭찬이라면 아이에게 독이 될 수 있어요.”


사모님은 이미 내 성장 과정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연결되고 있는 지점을 꿰뚫어보고 계신 것 같았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칭찬은 이런 것들이에요. 밥을 골고루 잘 먹는 것, 하루를 행복하게 보낸 것, 실수했을 때 엄마아빠를 부른 것. 이런 칭찬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더 커서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언제든 부모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의 기능(function)에 대한 칭찬을 많이 들은 아이들은 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순간, 부모에게 돌아오기가 어려워지죠.”


내가 희열을 느끼던 것이 아이의 존재였는지 아이의 기능이었는지 돌아보며 나는 사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가 성취를 해낼 때, 부모로서 그 성취감에 같이 취하는 건 어쩌면 당연해요. 저도 아이들이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알아채고 행복할 때가 있지만 아이한테 심지어 아이 아빠에게도 그 대단함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나는 뜻밖의 자리에서 교육학 인생 강의를 들어버린 셈이었다. 사실 비슷한 내용을 아내에게서도 들었었는데 귀 기울이지 못한 나의 불찰이 크다. 점점 아들의 성취에 더 취해가기 전에 조물주께서 선지자를 보내주신 것 같았다.  


“어쩌면 더 높은 급수의 한자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이를 위한 길일 수도 있겠죠.”


사모님의 말씀은 단호하지만 따뜻했고, 훈계 같지만 감싸안아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칭찬에 '걸맞는' 아이


나의 삶을 돌아보니 알겠다. 그 누구도 나에게 압박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 수많은 칭찬과 인정조차 나에게는 압박으로 작용했었다는 것을. 나의 노력은 주변의 칭찬에 걸맞는 아이가 되기 위한 ‘자발적’인 노력이었기 때문에 가시적으로는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자발적’이라고 해서 항상 건강한 동기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칭찬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궤도에서 이탈한 순간, ‘나는 곧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거나 ‘사람들에게 조롱받고 잊혀질 것’이라는 조바심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면, 그렇게 이루어낸 업적이 과연 ‘건강한 성취’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이루어낸 업적이 과연 ‘건강한 성취’라고 볼 수 있을까.


넘어져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아이


어른들의 과장된 칭찬이 없다면 어쩌면 아이의 성취는 조금 사그러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아이는 정서적 안정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잘하지 않아도, 어떤 실수를 해도 엄마와 아빠는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아이를 한층 더 건강한 아이로 자라게 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마음 속에 자리 잡는 것 같았다.


자기 본연의 교육 철학을 재확인한 아내와 돌아오면서 이런 저런 깨달음들을 나누었다. 아이가 한 일이나 재능에 대한 칭찬을 당장 그만두기는 힘들 수 있지만 그보다 아이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더 많이 표현하기로 했다. 부모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내면적 어려움을 드러내지 못하고 홀로 끙끙 앓는 아이로 키우기보다,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부모의 품에 언제든 돌아와서 다시 일어나는 용기를 지닌 아이로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사랑 받기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사랑을 주기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듯 하다. 아들의 어른스러움이나 비범한 재능을 난 여전히 좋아하지만 그 프레임에 아들을 가두는 일은 이제는 멈춰야할 것 같다.  


얼마 전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아이를 반갑게 맞아주신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문득 귓가에 맴돈다. 의사 선생님의 안부 인사는 어쩌면 내가 어렸을 때 들었어야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이상한 안도감 같은 것이 드는 그런 인사 말이다.


“그나저나 크리스마스가 곧인데, 우리 영원이는 선물 받을 수 있는 착한 일은 많이 했겠지? 선생님이 말하는 착한 일이라는 건, 밥 잘 먹는 것, 잠 잘 자는 것.”

“밥 잘 먹어요.”

“그럼 무조건 선물 받겠네~ 어린이들에게는 다른 것보다 그 두 가지가 최고로 잘하는 거거든!”

의사 선생님의 안부 인사는 어쩌면 내가 어렸을 때 들었어야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왜 '노란 띠'에 두근거렸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