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과 탐구는 결이 비슷하다.
19세기의 교실에서 20세기의 교사가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친다.
"주입식, 지식전달식 교육은 한계에 다다랐다. 시대에 맞는 다른 교육방법을 찾아 적용해야 한다."
21세기가 도래하는 90년대 말부터 교육 현장에서는 들려오던 말이었다.
주입식 교육의 가장 큰 단점은 주입이 되지 않으면 학습자에게 변화는 일어나지 않은 문제다. 반면교사는 더 똑똑해지고 학습자들은 더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학습만을 반복하는 구조가 지속된다.
기존의 주입식 교육의 형태를 비판하면서 문제해결학습, 프로젝트학습, 토론토의학습, 탐구학습 등 학습자의 주도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라 높아졌다. 기존의 수동성을 벗어나 능동성을 가지고 학습자들이 주도적으로 학습에 뛰어든다는 취지인데 그게 쉽지 많은 않다. 말 그대로 학습자들은 배우는 사람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가 명확하지 않기에 능동적인 학습이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알맹이가 빠져버린다면 위와 같은 학습의 형태는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 제삼자가 수업을 바라보았을 때 '무엇을 하고 있지?', '과연 배움이 일어나고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로 보아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주어진 지식들을 주입하고 전달하는 기존의 강의식 수업으로 전환해야 하나? 다시 교실에 절반은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거나, 다른 짓을 하고 나머지도 교사가 하는 설명을 그냥 일방적으로 듣고 따라 쓸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역시 알맹이는 있어야 한다.
개념이란 사실적 지식의 합이다.
자연의 목록에는 '의미'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우리가 부여한 것이 의미고 그것에 따라 우리는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고, 목적지향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다. 인간은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카메라가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 대상을 재구성하여 인식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느낌으로 표상한다.
즉, 자연을 상징으로 재구성하여 인지하는 것이다. 그 상징에 대한 공유로 우리 인간은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고, 심지어 그것을 또 다른 세상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나무'라 했을 때 각자가 떠올리는 나무는 대부분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나무'라는 상징을 어려움 없이 공유하고 전달하며, 이해한다. 자연의 모든 것을 심지어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마음과 행위에서 만들어진 세상의 모든 것을 기호(그림, 언어, 문자 등)로 변환하여 공유하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고 익힌다. 직관적으로 거칠게 표현하면 그것을 우리는 '교육'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학문은 '이름(명사)을 아는 것', 즉 언어학에 다름없다는 주장까지도 나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이름 붙인 수많은 사실들을 얼마나 더 많이 알고 있는지, 새로운 이름(사실)을 발견하고, 그 이름들을 관계 맺고, 연결 짓는 것이 학문이다. 더 고차적인 이론이란 사실적 지식들을 연결 지어 그럴듯하거나, 엄밀하게 검증가능하게 만들어 제시하여 많은 이로부터 납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수천 년에 걸친 인간의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이러한 이름(사실)들을 모두 알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도 새로운 사실들은 발견되고 있고, 새로운 이름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지식의 폭증'시대. 그래서 교육을 과거처럼 전과를 달달 외우고, 교사가 전하는 이야기를 빼곡하게 받아 적는 형태에서 변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는 것이다. 사실적 지식들을 뭉치면 개념이 된다. 대륙, 바다, 산맥, 강, 섬, 반도 등이 합쳐져서 '지리'가 되고 그것을 인간의 삶과 '연결'지을 수도 있고, 우리의 '책임'이라는 개념으로 확장시킬 수도 있다. 환경결정론이라는 '관점'으로 격상시켜 맥락적 이해를 도울 수도 있고, 가능론(환경결정론의 반대적 시각), 또는 절충론이라는 '관점'으로 지리를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에 기반한 학습은 사실적 지식이 넘쳐나고, 언제 어디서나 찾아서 접할 수 있는 지금 교육의 현장에서 더욱더 강조되고 있다.
논술문제나 서술형 문제들을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실적 지식들을 단순히 암기해서만은 답을 써내려 갈 수 없고, 그것을 맥락적으로 연결 짓고 자신의 논점으로 풀어내는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 취지이므로 교과서를 외우고, 교사가 전달하는 지식을 암기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개념이란 사실적 지식의 합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지리'라는 개념에는 지형이나 위치, 크기 등의 개념에서 또 산맥, 사막, 호수, 바다, 섬 등의 더 작은 개념으로 또 그 하위에 히말라야 산맥, 알프스 산맥, 안데스 산맥 등 사실적 지식으로 층위를 이루는 전체적인 맵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념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기둥들, 사실적 지식들에 대한 공부가 되어 있지 않으면 개념의 명료성은 떨어진다. 개념적 렌즈로 교과와 세상을 바라보기에 불명확한 렌즈와 또렷한 렌즈의 차이는 이해의 폭과 깊이를 다르게 만든다.
주입식 교육과 전달식 수업을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니다. 또한 학습자의 능동성이 강조된 수업을 무턱대고 지향할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알맹이다. 이런 사실적 지식이 토대가 된 토의토론식, 조사학습 등의 학습자의 능동성이 강조된 수업은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개념은 알겠어. 그럼 탐구는?
탐구에 대한 정의는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교과에서 탐구는 '이론과 사실에 대한 발견'으로 정리할 수 있다. 과학적이라는 말을 앞에 덧붙일 수 있겠는데 과학적 탐구란 관찰을 하며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인과성을 가지고 있는 자연이나 현상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자기 나름의 '가설'을 수립하여 그것을 구체적으로 '검증'하여 일반화된 사실이나 이론으로 접근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자벌레의 향성, 부력, 산과 염기성 반응과 같은 과학적 이론에서부터 사회과나 도덕과에서도 탐구학습은 이루어진다. 심지어 인간이 부여하는 가치도 탐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탐구학습의 방법은 수많은 학자들이 지금도 새로운 이론을 세우는 데 사용하는 주된 방법이고, 이런 탐구의 경험은 다른 탐구로 전이된다. 즉,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능동적으로 내가 가설을 수립하고 그것에 대한 검증을 이끌어낸 경험이 있는 학습자는 다른 학습에서도 그러한 경험을 써먹는다는 것이다. 내용적 전이뿐 아니라 방법적 전이까지도 강조했던 브루너의 '교육과정'에서 주장되었던 내용이고 이것이 인간의 기억력의 마모를 줄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구체적인 방안이라는 사실에 많은 교육학자들은 수긍하고 이것이 학문중심교육과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탐구학습 개념과 맥이 닿아있다. 사실에 대한 결합으로 개념은 단순히 기계적 결합이 아니라 그것이 결합되는 과정을 체험하게 되면 체화가 더욱 강력하게 일어나고, 그러한 경험, 즉 탐구를 통해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은 다른 개념의 이해에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일본(왜)은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라는 의문으로 탐구하면서 '가까우니까'라는 단순한 형태적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다른 가까운 나라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탐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탐구로 '가까운 나라들 사이에는 전쟁이 빈번했고,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라는 이론을 도출해 냈다면 그것을 '관점'이라는 개념적 렌즈로 장착하고 또 다른 탐구의 여정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다른 관점과 충돌할 수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생각에 수정을 가할 가능성도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연도, 사건, 인물 등과 같은 사실들을 전달하고 그것을 암기하고 시험을 치는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학습 방법이지 않은가?
어느 것이 더 교육적인가?라고 물었을 때 다들 다른 관점으로 대답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