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색을 명료하게 만드는 의도된 학습 경험
가르칠 내용은 많으나 시간은 한정적이다.
배우는 학습자들의 고충이기도 하고 가르치는 교사들의 고민거리이기도 한 이 말은 어떻게 가르치고 익혀야 하는지에 대한 영감을 준다.
교과서는 무수히 많은 지식들의 총합이다. 거기에서 시험문제가 나오고 그것을 우리는 완전히 숙지해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가 있다. 수행평가, 과정중심평가 등으로 평가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지만 여전히 교과서는 바이블이고 평가의 전범(모범)이다. 그래서 '완전학습'과 같은 말이 등장했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며 교사와 학습자들을 몰아세우기도 했다. 사실상 대입을 위한 교육으로 전락해 버린 우리의 초. 중등교육은 어찌 보면 한정적인 범위 안에서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그 교과에 해당되는 문제를 풀어보았는가?를 측정하는 평가에 가깝다. 그래서 지식의 질이 아닌 양적 측면을 더 중요하게 다룬다. 좀 더 거칠게 나누자면 지식을 양적측면과 질적측면으로 양분하여 보았을 때 양적측면을 더 강조하는 것을 '전통적 교육관'이라면, 질적측면을 더 강조하는 것을 '진보적 교육관'이라 할 수 있다. 대다수는 심정적으로 철학적으로 진보적 교육관에 대해 공감하고 그것이 나아갈 방향이라 이야기하지만 학교의 실상은 전통적 교육관에 머무르고 있다. 원인은 모두가 알다시피 대입의 평가 방법이 지식의 양을 측정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식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을 다 알았다고 하는가? 반면 가진 지식이 없는데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핵심적인 지식은 전달되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서 탐구나 조사학습 같은 학생들의 액티브한 활동이 강조된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한다. 칼로 무를 자르듯이 양분하여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교육이라는 것이 결국 삶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있다.
이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의미이자 세상은 어떤 맥락 안에서 볼 때, 그들만의 의미와 질서를 나타낸다는 뜻이다. 맥락이라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 등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 개별적 지식이 모여 개념을 이루고 이러한 개념은 맥락적으로 사용되고 파악된다. 숫자의 개념은 맥락에 따라 '순서'를 뜻하기도 하지만 '양'을 뜻하기도 한다. 세세한 세부지식을 전달하고 그것을 암기하는 것보다 상위의 개념을 이용하여 사고를 하는 것이 더욱더 필요한 이유다. 사용되는 지식의 연유와 근원, 목적을 파악하면 보다 실제에 접근하기는 수월해진다. 뇌라고 하는 휘발성이 강한 기억장치에 강한 흔적을 남기고 그것이 다른 기억으로 전이되어 사용된다. 우리는 그런 기억을 이용한 힘을 안목, 사고력, 상상력, 문제해결력 등으로 부르고 있다. 즉 개념적 사고를 통한 안목과 사고력의 확장이 필요한 이유다. 기억은 경험이 만든다. 인간의 경험은 목적과 의도를 갖추었을 때(능동적) 보다 의미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개념적 사고 경험이 우리가 다루어야 할 지식을 장기기억으로 옮기는 데 유리하다는 원리다.
결국 실제 사물이나 대상, 사건, 인물 등을 간접적으로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상징과 기호, 즉 언어와 문자, 그림 등으로 다루게 되는 학교라는 공간은 보다 개념적이고 탐구적인 학습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이에 따른 개념을 기반한 탐구학습에 대해 전 챕터에서 다루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실천하는가? 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위 내용은 필자가 직접 작성한 개념기반탐구수업 계획안이다. 4.19, 5.18, 6월 민주항쟁, 촛불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근대사는 '직접 민주주의'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인간의 신념에 따라 세상은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라는 탐구단원의 이름을 짓고 민주주의, 혁명, 쿠데타 등의 근대역사를 다룬다.
탐구의 시작은 관찰이고 질문이다. 왜 달력의 날짜와 같은 숫자들이 우리 근대사에 굵직굵직한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나? 등의 학생 수준에서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질문에서부터 탐구는 시작된다. 각 교과는 고유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과학에서의 세포, 물질, 생명, 암석, 원소 등이 그러할 것이고 사회에서 정치, 경제, 민주주의, 지리, 역사 등이 그러하다. 수학과 같은 고차원의 상징을 다루는 학문은 모든 용어가 개념이라 생각하면 된다. 교과를 아우르는 보다 상위의 개념들을 핵심개념이라 하고 이에 속하는 것으로는 형태, 기능, 변화, 연결(원인), 관계, 관점, 책임 등으로 정할 수 있다.
* 위의 탐구계획은 국제인증 교육과정으로 IB(인터내셔널 바칼로레아)에서 정해놓은 PYP(초등프로그램) 프레임워크에 기반한다.
다른 챕터에서 언급한 '지식의 구조'맵에 내용을 대입하면 위와 같다. 여기서 개념(핵심개념)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탐구의 방향이 결정된다. 사건들의 성향에 따라 분류해 보고 그것의 성격을 규명한다면 형태나 원인과 같은 렌즈를 끼울 수 있다. 사건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서로 비교해 보고 분석해 보며 토론한다면 관점의 렌즈를 끼울 수 있을 것이고, 시간에 따른 과정을 다룬다면 '변화'의 렌즈를 대입할 수 있다.
위의 표는 보다 구체적인 설계와 실행 계획이다. 질문과 평가 등의 내용이 추가된다.
개념과 학습에 접근하는 방법에 따라 평가의 루브릭을 수립하고 계획할 수 있다. 평가의 내용과 방법을 미리 공지한다면 보다 학생들을 목적지향적인 활동으로 이끌 수 있다. '백워드식 설계'에 따른 접근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목적지향적인 인간의 성향을 교육에도 접목시킨 이러한 시도는 결과가 아닌 과정을 강조하는 '평가'의 철학에 따라 현장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론으로 구체화시키는 탐구의 과정을 학생들이 그대로 전철을 밟도록 계획해 본다. 브루너의 교육의 과정에서 밝힌 '핵심적 확신'에 따른 어린 탐구자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강한 기억으로 옮겨가고 그것이 다른 탐구에도 전이가 된다.
탐구의 마지막은 성찰이다. 교사와 학생, 평가 등 주체나 영역에 따른 성찰이 가능하다. 성찰은 또 다른 탐구나 개선된 탐구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일련의 흐름을 1년에 4~6개의 단원으로 계획한다. 과학이나 사회와 같이 탐구의 성격이 강한 교과가 전체 단원을 이끌어 가고 그 속에서 국어와 영어 같은 도구교과는 여러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표현이나 실행 단계에서 예체능 교과를 적용시킬 수도 있다. 탐구의 단원으로 이끌어오기 힘든 개념의 덩어리의 학문, 수학과 같은 교과는 독립적인 계획을 수립하되 역시 개념을 기반으로 한 탐구학습으로 진행할 수 있다.
지면의 한계상 다른 예시를 싣진 않았지만 이와 같은 탐구의 여정에서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사실적 지식, 즉 내용이라는 지식의 구조를 받들고 있는 기둥이다.
이러한 지식이 없이는 개념에 기반한 질 높은 탐구를 기대할 수 없다. 탐구의 끝에 깊이가 있는 자신의 일반화된 생각을 문장으로 기술할 수 있으려면 사실적 지식에 대한 폭넓은 기억이 필요하다. 그것을 우리는 단순히 암기라 부르며 매도할 일이 아니다. 필자가 정작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통적 교육관과 진보적 교육관의 공학적 구분이나 물리적 절충이 아니라 융합적이고 집합적인 사고다.
우리의 삶을 하나의 렌즈로만 볼 수 없듯이, 삶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교육은 다채로운 렌즈로 바라보고 접근해야 하는 까닭과도 같다. 시간과 공간은 한계가 있지만 우리의 뇌는 우주보다 넓다. 맥락적으로 세상을 넉넉하게 이해할 수 있는 힘은 기억의 힘과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개의 개념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은 결국 경험, 즉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본 탐구의 경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