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홀덤이라는 게임을 아는가? 이마에 자신이 모르는 카드패를 붙이고 서로 돈을 거는 게임이다. 오로지 상대편의 표정을 보고서 자신의 패를 추측해야 한다. 아니면 상대편의 패가 지극히 낮으면 확률을 예측하여 돈을 더 던져 넣을 것이다. 대학교 엠티 때 비슷한 게임을 한 적이 있다. 막걸리 한잔 그리고 화투한 장씩 받는다. 30명이 넘는 과인원들이 원으로 빙 둘러앉아 받은 화투장을 이마에 '척' 붙인다. 그리고 상대편의 패를 보며 자신의 패를 예측해서-화투는 48장이니 30여 명의 패를 보고 자신의 패를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다.- 승산이 있다 싶으면 받은 막걸리 한잔을 커다란 대접에 따라 붓는다. 자신 없으면 받은 막걸리를 한잔 들이키면 된다. 밤일낮장이라고 똥을 들고 자신의 잔을 거는 친구가 있으면 다른 친구들은 낄낄거리며 너도나도 대접에 막걸리를 부어댄다. 그리고 마지막에 패를 다 까고 가장 낮은 패(밤에는 높은 수의 패)를 가진 녀석이 대접에 축적된 막걸리를 다 마셔야 되는 잔인한 게임이다.
소위 '붙이기'게임이라 불리던 그 게임 역시 인디언홀덤과 같이 상대편의 표정을 보고 내 패가 무엇인지를 예측한다. 이렇듯 우리는 상대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것을 심리학적 용어로는 '사회적 자아'라 한다. 의식의 출현에 대해서는 아직 명료한 이론이 정립되지 않았지만 의식이 내면을 향할 때, 그리고 바깥 대상과 나라는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 짓게 될 때 '자아(self)'는 출현가능하다고 말한다. 아마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이런 류의 생각 말이다. 말 그대로 세상과 나의 경계를 구분(지각)하면서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게 되는 그때의 나이는 사춘기 무렵일 것이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이런 말을 자주 듣기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상대를 통해 나라는 인간을 규정짓는 것이 더 객관적일지도 모른다고 인식하는 것 같다. '네가 봤을 때 나는 어때?' 진실게임에 자주 등장하는 레퍼토리다. 네가 봤을 때 나라는 인간은... 다수의 타자도 역시 주관을 가진 인간이라 객관적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지만 우리는 늘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집안에 혼자서 속옷만 걸치고 거실을 활보하는 나는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하지만 화장을 하고 갖추어 입고 회사에 출근하여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나는 진정한 자유의지를 숨긴 채 타인의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인이다. 너는 꼭 늦더라, 너는 참 웃긴 애야, 너 정말 솔직하다... 친한 관계일수록 나에 대한 평가는 직설적이다. 이미 나라는 인간에 대해 어느 정도 정의 내려진 30-40대의 나이면 놀라지 않겠지만 10-20대 때 친구들의 '정문일침'을 듣고 깜빡깜빡 놀란 적이 많다. 나는 내 머리가 그렇게 큰 줄 몰랐다. 말대가리처럼 긴 얼굴을 하고 있는 친구를 놀리다가 '너도 못지않아'라는 말을 듣고 당장 거울로 달려가 내 머리 크기를 확인한 적도 있었다. 생각보다 나는 똑똑하지 않았으며, 게으르고 늦은 아이였다. 그러나 착하다, 순하다는 친구들의 평가에 그게 나인가 보다... 하며 더 착하게 굴던 10대의 내가 떠오르기도 한다.
즉, 사회가 나에게 들어와 내면화되면서 나라는 인간은 '주체'를 가지게 된다. 단순히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인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 표정뿐만이 아니다. '어 저 친구 입은 옷 멋진데?,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와! 저 녀석, 저런 발표를 하다니 정말 멋진데...' 사회의 형태, 기능, 관계, 관점 등을 체화하기도 한다. 말을 어쩌면 저렇게 논리적으로 하지? 겸손한 저 사람의 태도를 본받아야겠어, 우리 부장의 리더십은 정말 훌륭해, 저 친구의 유연한 인간관계는 매력적이야' 이런 혼잣말(생각)은 곧 자신의 기억의 심연에 자리 잡게 되어 어느 순간 모방하려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조직사회에서 털털한 웃음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던 묵직한 동기 녀석의 겸손함과 신중함을 보면서 늘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친구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다는 생각에 흠칫 놀란적도 있었다. 옷이 많은 것도 않은데 입는 옷마다 얼마나 세련되었는지... 그 친구의 옷 입는 스타일에 따라 장바구니에 옷을 담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는 모방 속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그것을 교육학에서는 '사회적 구성주의'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뇌에는 방추세포와 거울뉴런이 있다고 이야기했었다. 모방의 심리는 호모사피엔스가 사회를 이루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명망가를 따르고, 배우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능은 종교나 정치 등의 영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독재자는 자신의 힘과 권력으로 대중을 장악하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 하지만 세계 3대 종교의 지도자(붓다, 그리스도, 무함마드)를 따르는 세계 수십억의 인구는 여전히 그를 위해 아마 목숨까지도 불사한다. 이렇듯 사회를 모방하고 학습하려는 본능이 개인이라는 생물학적 개체와 융합되면서 자아가 구성된다는 것이 바로 사회적 구성주의, 사회적 자아의 개념이다. 우리는 결국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사회화되어가는 인간이기에 이점은 분명 납득이 간다. 하지만 사회라는 환경의 강조에 치우치다 보면 개인성이라는 영역을 자칫 소홀하게 볼 수 있는 우려가 있다. 즉, 타고난 성정이라는 것 말이다. 물론 현재는 유전론과 환경론을 절충하는 상호작용론을 대세로 보고 있다. 분명한 것은 타고난 개인의 성정은 사회라는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명료하게 구성되고 그것이 주체성을 가진 자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을 교육과 학습의 영역으로 치환하여 곰곰이 따져 생각해 보면 참 많은 점을 깨닫게 해 준다. 아무리 타고난 자질이 부족하더라도 주변의 환경에 의해 그것은 의도되로 수정될 수 있다는 결론은 '관계'라는 개념에 대해 방점을 찍게 만든다. 결국은 관계라는 것이다. 대상과 나와의 관계, 나와 타인과의 관계, 대상과 대상과의 관계... 그 관계에 대해 더 생각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