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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Mar 28. 2024

아이가 크는 만큼 점잖아지는 살림살이

유리 손자국만은 여전하다고 한다

재미있는 짤을 보았다.

신혼부부가 부모가 되면서 변모하는 살림의 양상을 소름 돋도록 사실적으로 표현한 ‘신혼부부 인테리어 변천사’다. 1단계, 그러니까 신혼부부 시절의 집은 인테리어 매거진에 '북유럽의 감성을 담은 노르딕 하우스'로 소개될법한 아늑하고 깔끔한 집이다. 눈이 편안한 색감의 소파와 라운지체어, 우드톤의 바닥. 어쩐지 케냐 AA 블렌딩 원두커피의 향이 날 것만 같다. 

2단계부터는 부부에게 천사가 찾아온 것 같다. 정갈하던 나무 바닥에는 아이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뽀로로와 친구들이 잔뜩 그려진 형형색색의 매트가 깔렸다. 단계를 거듭할수록 인테리어에는 강렬한 변화가 찾아온다. 누워서 장난감 모빌을 발로 차며 노는 아기체육관과 문 사이로 기어 다니며 여러 가지 버튼을 누르면 소리가 나는 대형 문짝까지 '국민 육아템'이라 불리는 거대 장난감들이 거실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아이의 활동반경이 커지면서 커피 향이 날 것 같던 거실은 본격 키즈카페화 된다. 뭐, 진짜 키즈카페 구석에도 눈밑이 어둡고 등이 굽은 육아러들을 위한 커피 테이블이 있으니 꼭 커피 향이 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겠다. 아이들이 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차부터 놀이텐트가 배치되더니 마침내 북유럽풍 거실에 사망을 선고하는 최종보스가 등장하며 신혼부부 인테리어 변천사는 막을 내린다. 바로 통돌이 세탁기만 한 대형 미끄럼틀이다. 순결하던 백색 벽지는 눈이 아프도록 선명한 원색의 한글 및 숫자 포스터들이 붙어 있고, 라이트그레이 톤의 페브릭 소파 위에도 갖가지 작은 장난감들이 널브러져 있다. 


게시글 아래로 이런 댓글이 달렸다.

“신혼부부 부럽다.”

“최종이네요. 포기했어요.”


아이 있는 집이 모두 똑같이 이런 모양새는 아니겠지만 육아란 대체로 이렇게 불쑥 삶을 장악한다. 커피 향이 가득하고 스피커에는 더 걸 프롬 이파네마 따위가 흐를 것 같던 공간에 대형 미끄럼틀이 놓이고, 거울이며 벽에는 덕지덕지 반짝이 스티커가 붙는다. 다 된 밥에 왠 뽀로로냐고 항의할 새도 없이 아이를 키우는 삶은 변화하고 진화한다. 그렇게 정신을 쏙 빼놓는 몇 년을 거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제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 여드름 난 아이만 남겠지. 




아이가 이제 저학년을 졸업한 터라 우리 집 살림살이도 제법 점잖아졌다. 넘어져 다칠까 깔았던 푹신한 매트는 가볍고 관리가 편한 라탄러그로 바뀌었으며, 곳곳에 붙어 있던 구구단 곱셈표랄지 미술 작품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 창조적 영감이 미친 듯이 쏟아지던 꼬마 시절엔 종이접기, 클레이, 그림 작품들이 집안 곳곳 눈 돌리는 모든 곳에 있었다. 이제 주방놀이 장난감들은 재활용 쓰레기로 배출한 지 오래. 작은 크기의 장난감들, 은행놀이나 헬로키티 푸드트럭 따위만 아이방 베란다 구석에 얌전히 놓인 채 연 1-2회의 호출을 기다릴 뿐이다. 


아이가 늘어놓는 것들, 정신없이 붙여놓는 것들에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졌으니까. 꼭 엄마가 봤으면 하는 것들, 한 면을 맞춘 큐브나 과학시간에 만들어온 자석 장난감 따위는 늘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갔는데 이제는 진짜 내 물건뿐이다. 그동안 아이가 어지럽혀서 화장대 위가 너저분한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도 쭉 너저분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제 점잖아진 살림살이가 또 어색하다. 어제는 아이가 학교 오케스트라 합주가 있어 밖이 어둑해질 때까지 밖에 있었는데 어둠에 잠긴 채 거실의 주광색 조명만 켜져 있는 조용하고 단정한 집이 어찌나 낯설게 느껴지던지. 졸업인 것이다. 신혼부부 인테리어 변천사를 모두 겪은 후, 완전하지는 않지만 처음의 단계로 돌아왔다. 내 삶을, 내 공간과 시간을 우당탕탕 장악하던 꼬마는 이제 거실과 주방, 안방 여기저기에 하던 영역표시를 싹 거두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만의 세계를 집 밖과 자기 방 안에서 부려놓는다. 


엊그제 오랜만에 아이가 거실 벽에 뭘 붙였다. 싫지 않고 반가웠다. 이런 게 반가워지는 때가 되었나 보다. 고등학생만 되어도 부부와 아이의 집이 아니라 성인 셋이 사는 느낌이 나려나? 아이가 갑자기 혼자 등교를 하겠다 선언하고, 친구와 통화할 때는 꼭 방 문을 닫고 들어가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거실이, 오후의 긴 자유 시간이 무척이나 이상하게 느껴진다. 집은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더욱 깔끔해질 것이다. 그리고 빈 공간만큼 가슴 한편이 허전할지도 모르겠다. 


무... 무슨 계시가 우리 가족에 임할지 무척 궁금해지는바



요란한 색도 장난감도 사라진 살림살이에도 여전히 건재한 아이의 흔적이 있다. 그건 바로 거울과 유리창의 손자국... 이건 사라져도 아쉽지 않겠어 (느낌표 세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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