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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Mar 14. 2024

합숙의 조건

우리 남편은 연애 프로그램, 속칭 연프 마니아다. 하트시그널부터 환승연애까지... 티브이 앞에 정자세로 앉아 매주 청춘남녀가 서로에게 던지는 얽히고설킨 사랑의 작대기쇼를 열심히 본다. 마치 남녀 신입 사원들의 한마디 대화에도 혼자 흐뭇해하는 부장님 같다. 나도 남편 옆에 앉아 같이 그 달달한 프로그램을 보는데 자꾸만 거슬리는 게 있다. 이 사람 저 사람 간 보는 출연자 보다, 말도 안 되는 트집으로 시작하는 사랑싸움보다 더 봐줄 수 없는 장면. 그건 바로 치우지 않은 채 방치된 공용 공간이다. 


연애프로그램은 남녀가 한 숙소에 일정기간 지내며 찍기 때문에 식사와 술자리 장면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진해질수록 깊숙이 묻어둔 진심도 요동치기에 연애 프로그램에서 술자리는 꽤 중요한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깊은 밤바람을 쐬러 나온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만으로도 많은 말을 하고, 또 어떤 누군가는 다락방에서 답답한 마음을 토해내듯 흐느낀다. 공용공간에서 한바탕 먹고 마신 그들은 그렇게 사랑에 울고 웃다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잔다. 그냥 잔다. 나는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다가도 그 꼴을 보면 속이 뒤집힌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테이블 위에 놓인 안주와 나뒹구는 술병들. 그것이 문제다. 


날림 살림꾼이 결혼 전이었다면 이런 모습이 거슬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거슬린다. 심하게. 남편과 나는 "쟤들 또 안 치우고 자네!" 하며 동시에 혀를 찬다. 꼰대로구나 라떼로구나 B사감이로구나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나저나 젊은이들은 <B사감과 러브레터> 모르겠지...) 살림을 꾸려가는 우리는 내가 치우지 않으면 아무도 치워주지 않으며, 오늘 치우지 않으면 내일 갑절로 더러워진다는 냉혹한 생활 원칙을 알아버렸다. 음식물 찌꺼기는 바로 제거하지 않으면 그대로 눌어붙어 내일 제거하기 더 힘들어지며, 술병이 아침까지 나뒹굴면 공간에 퀴퀴한 술 냄새가 난다. 그래서 제 아무리 넓은 등짝을 자랑하며 치명적인 턱선을 뽐낸다 해도 눈앞의 맥주캔을 상쾌하게 패스하는 출연자는 내겐 마이너스다. 반면 일어나자마자 공용공간을 치우고 분리수거를 착착 해내는 살림 요정에게는 무조건 합격 목걸이가 주어진다. 




사실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면 할 말은 없다. 나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합숙의 조건을 몰랐으니까. 엄마가 차려준 밥 홀랑 먹고, 제 몸뚱이만 깨끗이 씻고 밖으로 놀러 다니기 바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온 엄마는 나에게 그런 잔소리할 여력도 없었기에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어른이 되었다. 스스로 깨달았으면 좀 좋았으련만 지금도 날림 살림을 하는 내게 그런 살뜰한 센스가 있을 리 만무하다. 결혼과 함께 처음으로 살림의 주체가 되어서야 물 한 잔 마시는 일에도 '컵 닦기'라는 옵션이 따른다는 엄중한 진리를 깨달았다. 먹고 마시고 나면 뒤치다꺼리는 필수다. 먹은 건 치우고 쓴 물건은 제자리에, 매일 떨군 머리카락과 각질의 존재를 자각할 것. 그것은 자기 공간을 소유한 자의 의무이자 권리다. 그리고 그 공간을 공유한다면 더더욱 지켜야 하는 조건임을 뒤늦게 알았다.


한편 엄마가 된 나는 애벌레 허물 벗듯 바지를 벗고, 허리 한 번 굽히는 게 귀찮아서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섬세한 발가락 관절 움직임으로 집어내는 우리 딸에 기시감을 느꼈다. 어! 저건 나잖아. 정리라곤 도통 모르고 귀찮은 게 세상 제일 싫은 내 모습이 거기 있었다. 부모에게 주는 신의 형벌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가장 싫은 면을 꼭 닮아버린 자식을 보는 것 아닐까. 이대로 두었다간 커서 자기 관리 안 되는 어른이 될지도 몰라. 나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딸에게 합숙의 조건을 교육시킨다. 조건은 많지도 않다. 그릇은 싱크대에. 빨래는 빨래통에. 자기 물건은 자기 방에. 어린 나도 그랬겠지만 나의 아이도 쉽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반복해서 가르친다. 서로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언젠가 누군가와의 합숙을 대비하기 위해서. 

어린이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항간에 떠도는 주부들의 살림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기본적인 공동생활의 기술조차 탑재하지 못한 불혹과 지천명도 많은 듯하다.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고, 컵 하나 제자리에 안 갖다 두는 등의 행태를 들으면 날림 살림꾼의 속까지 뒤집어진다. 


독립해 혼자 사는 집이 아니라면 피를 나눈 가족끼리도 합숙의 룰을 따라야 한다. 간단한 룰만 각자 지켜도 가정은 평안하고 살림은 산뜻해지니까. 합숙 매너가 가정의 평화를 지킨다. 교육관부터 취미 존중 여부, 오늘의 저녁 메뉴까지 공동 생활자가 서로 대립할 일은 얼마나 많나. 기본적인 합숙의 매너만 지켜도 소모적인 논쟁을 피할 수 있다. 반려자의 바가지를 피하고 싶다면 어떻게 돈을 더 많이 벌까 보다 어떻게 손이 덜 가게 할까를 궁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이상 사용한 화장솜을 왜 맨날 화장실 선반에 올려두냐는 남편의 비난에 "여기저기 코 푼 휴지나 두지 마라. 이 비염 남편아!"로 맞대응하는 날림 살림꾼이 합숙의 매너에 대해 훈수 좀 두어봤다. 매너 있게 살기가 애나 어른이나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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