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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Apr 04. 2024

꽃다발 대신 명이다발

마, 살림은 낭만이제

각종 장아찌류를 좋아한다. 마늘종 장아찌, 깻잎 장아찌, 양파 장아찌, 고추 장아찌... 짭짤하면서도 달콤하게 입맛을 돋워주는 장아찌는 맨밥에 먹어도 맛있고 누룽지, 국밥 등 무엇과 곁들여도 잘 어울린다. 상큼하고 아삭한 장아찌와 기름기 많은 고기의 궁합은 말해 무엇하리. 간장과 식초, 설탕, 때로는 고추장 된장까지... 각종 센 양념들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아삭한 자기만의 식감을 그대로 유지하는 장아찌의 줏대에 먹을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특히 내가 최근 몇 년 동안 즐겨 먹고 있는 장아찌는 명이장아찌인데, 어느 카페에서 우연히 파는 것을 먹어보고는 매년 이맘때쯤 주문해 먹고 있다. 카페 사장님은 친구 어머님이 울릉도에서 직접 만드신 것을 공수해 파는데 부드러운 햇명이에 새콤달콤한 간장소스가 부어져 감칠맛이 대단하다. 몇 년째 그렇게 남편에게 픽업을 부탁해 가며 몇 통씩 사서 양가 부모님께 보내고, 우리 집에도 일 년 내 두고 먹는다.


올해는 언제쯤 공동구매 소식을 올리시려나, 기다리고 있는데 동네 마트에 소스가 포함된 명이 1킬로를 저렴하게 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살림의 기본기는 없어도 낭만은 살아 있는 게 날림 살림꾼이다. 사람도 자연이니 저 새처럼 나무처럼 계절을 느끼고 살아야 하는 법. 그리하여 제철의 음식들은 기회가 될 때 부지런히 먹으려 한다. 왜 살림의 낭만이 먹는 것으로만 귀결되는 거냐고 묻지 마라. 먹는 게 남는 거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명이박스를 사들고 왔다. 작은 박스로 하나 가득 들어있는 명이의 생기는 대단했다. 줄기가 꺾여 저 먼 강원도에서 제주까지 배를 타고 왔음에도 전혀 숨이 죽지 않은 듯 파릇파릇한 이파리들. 베이킹소다를 푼 물에 살짝 두었다가 하나하나 깨끗이 씻으며 봄을 약 2분간 느낀 후, 나머지 23분 동안 허리통증과 함께 '사람들이 괜히 돈 주고 사 먹는 게 아니구나', '마른 사람들도 주방 수도를 쓸 때 티셔츠의 배 부분이 젖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념을 이어간다.




원래는 명이를 씻어만 두고 남편이 퇴근하면 같이 담그기로 했으나 씻어 펼쳐둔 게 꽤 많고 그대로 저녁까지 두기가 뭐해서 나는 같이 들어있던 소스를 끓여 후다닥 장아찌를 담그기로 했다.

어엇, 소스 양이 생각보다 적은데? 그래도 일단 명이 위에 붓는다.

택도 없다.

너무 걱정 말자. 양념이 강하니까 금방 부피가 줄어들 거야.

무거운 접시를 하나 올려두고 기다린다.

한 시간 후. 갓 채취한 듯 탱탱한 기세가 여전한 명이. "감히 우리를 담갔겠다?" 하는 느낌이다. 숨이 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두 시간 후. 안 되겠다 싶어 소스를 다시 냄비에 붓고 물을 추가해 끓인 후 식혀 붓는다. 방수처리된 듯 양념 방울을 튕겨내는 명이가 나를 비웃는 것만 같다. 그렇다. 자신이 똥손이라면 나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도전의식, 의지, 충동이 일 때 조금 참아볼 필요가 있다.


퇴근한 남편을 붙잡고 명이와의 대결을 낱낱이 고하니 참 호들갑 떨 일도 없구나 싶은 남편의 반응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금이의 A/S타임. 무와 이것저것을 넣고 끓이더니 넉넉해진 소스를 만들어 명이가 푹 잠기도록 부었다. 크으- 향이 제대로다. 이로써 오늘의 명이전투는 주방평화유지군의 지원으로 성공적 마무리를 거두게 되었다. 심지어 양념장이 남아 내친김에 미나리도 담가보기로 했다. 우리 집 어린이는 미나리를 질색하므로 청양고추도 양껏 넣어야지!


봄이 오면 동네 마트에는 플라워 코너가 생긴다. 나도 튤립이니 프리지아니 하는 것들을 사는 게 봄의 루틴이었는데 올 해는 식재료값이 너무 무서워 꽃다발을 쳐다볼 용기도 없다. 하지만 오늘 물기를 털며 잡아본 명이다발은 꽃다발 못지않은 만족감을 주었다. 그래, 꼭 꽃만으로 봄을 느낄 필요는 없지!

제주에는 엊그제 저녁부터 어제저녁까지 긴 비가 왔다. 내 청춘만큼 벚꽃도 광속으로 져버렸지만 괜찮다. 비가 와도, 미세먼지가 콧구멍을 공격해도 봄은 봄이고, 향긋하고 싱그러운 봄나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아찌를 핑계 삼아 봄나물을 먹는 걸까. 봄나물을 핑계 삼아 장아찌를 담그는 걸까. 아무래도 좋다. 긴 겨울이 지나고 새로이 돋아난 것들을 먹는 기쁨만은 가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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