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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 Feb 06. 2024

여느 고양이의 얕은 숨을 아십니까?

미적지근한 바닥에서 빵을 굽듯 누운 고양이는 삼십분이 좀 지나면 내 품으로 뛰어 올라와 앉는다. 졸린 눈을 깜빡 거리며 유영하듯이 자세를 번갈아가며 그루밍하기에 바쁘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이름을 부르면 바쁘게 움직였던 분홍빛 혀가 빼꼼 나온 채로 나를 바라본다.


두 뺨을 쓰다듬고 가만히 만지다 보면 장난이 발동한 듯 두 발로 손을 잡아 앙 물다 이내 핥아 올리곤 눈을 감는다. 이 작고 귀여운 친구가 잠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빠르면 십분에서 한 시간.

더 늦으면 세 시간을 괴롭히고서야 품에서 잠에 든다.


발치에서 자던 아이가 얼굴을 맞대고 자기 시작한 건 한 달이 좀 더 넘었다. 엊그제 새삼스레 맞닿은 얼굴에서 얕은 숨이 느껴졌다. 덥지도, 차지도, 미지근하지 않은 보통의 온도로 숨을 쉬는 이 아이는 나와 자신의 숨을 공유하며 잠을 청한다. 그것이 예뻐서, 너무 예뻐서 잠든 얼굴을 몇 번이나 쓰다듬고는 한쪽 귀퉁이에 몸을 구겨 넣고 밤을 보낸다.


새파란 하늘 위로 뻗어 나간 매미의 울음소리, 울긋불긋한 코트로 갈아입고 여행을 떠나는 나뭇잎, 텅 빈자리 위로 희망을 걸기 위해 전구로 화관을 대신하는 일상을 모두 보고 나니 새해가 떠올라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소식을 전하던 것을 그만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세상이 발갛게 물들어 갈 때쯤 이었다. 한 차례의 소란이 지나가고 난 후 였다.


나와 너를 너무도 잘 안다고 간과한 사람이 있었다. 잘 됐으면 하는 바람에 소리를 질렀다 쳤다 한들 나와 한 뼘의 숨도 제대로 공유해보지 않은 사람이 던지는 날카로운 말을, 삼키느라 눈물을 쏟아냈던 것이 아까울 정도의 일이었다. 그것이 나에게서 비롯된 일이라 해도, 누구의 경중이 더 크고 잘못 됐음을 하나하나 가리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다만, 글을 중단하게 된 계기는 여기에 있었음을 알릴 뿐이다.  


시계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시간을 가뒀다고 한 번쯤은 착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길 때였다. 두 발을 제대로 땅에 딛고, 씩씩하게 걷고 있는 것이 분명한.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 같은 친구가 찾아와 맑은 목소리로 네 생각이 났다며 웃어 보이곤 한 손에 책을 들려 주었다.


나는 네가 참 소중해, 그러니까 너도 너의 소중함을 알았으면 좋겠어.  


매번 어쩜 그리 다정한 표정으로 나에게 속삭이는지. 세상을 살아가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나 자신의 부모가 되어줘야 하고, 성실한 가장으로서 열심히 살아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좋았다. 나의 콤플렉스나 좋지 않은 점을 모두 품어줄 이는 세상에 없음을 똑바로 인지하고, 좋은 것은 함께. 나쁜 것은 선생님 혹은 친구와 조율해 나가면 되는 부분이라는 것.

투영해 볼 수 있을 만큼의 투명함보단 불완전한 불투명의 색을 띠어도 괜찮음을, 인지하고 나니 괜찮아졌다.


그래서 있다고 다 보여주지 말란 말이 있는 거였어.


빨갛게 노을 지듯 넘어가던 11월 어느 무렵에 나타난 작은 친구와 함께 한 지도 3개월이 흘러간다.

하루가 뻔하게 흘러가게 되어도 아무래도 좋아졌고, 취업의 압박에서 조금 벗어나 스스로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취미를 찾기도 했다. 십 년 만에 공부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꽤 좋다. 삶이 꼬였다고 자책하는 빈도도 줄었다.


취미를 업으로 삼고 싶을 만큼 재미를 붙이는 요즘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크고 작은 것에 간절함을 담아서 살아가고, 그 간절함이 불안으로 넘어섰을 때 실체 없는 기적에 기댈 때도 있음을.


그 기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내가 아닌 당신이라는 것을 끝으로 조언을 건네줄 때 소름이 돋는다.

이만치 내가 간절했던 적이 있나. 감히 당신의 간절함에 입을 달싹여도 되는가를 매일 되묻게 된다.

고맙다고 인사를 해오는 사람들에게 나는 다시 말한다.


당신의 혜안으로 빛낸 결과임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부디 당신의 간절함 안에 있는 본질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일을 할 때에도, 관계를 맺을 때에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간절하다’ 라곤 하지만 그것의 본질을 파악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부터도 그러하기에 실천하려 한다. 어떠한 상황에, 일에, 관계에  그것의 진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했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쉽게 말하면 당신과 나 사이에 건넨 말 중에 진심이라고 담은 그 말.

그 말 뜻을 온전히 이해해 보려고, 마음으로 대하려고 노력 했는지다.

실패한 게 떠오른다면 아마 그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어느 한쪽은 귀 기울이지 못해서 생긴 부재를 내 탓이 아닌 너의 탓으로 돌려 정당화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더 부끄럽고, 힘들기에 아니라고 우기는 그것. 그것을 바로 잡는다면 우리는 간절함이라는 그 단어에 기적으로 치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봄의 얕은 숨을 불어 넣을 비가 내리는 아침, 타닥 거리는 타자기 소리에 매섭게 노려보는 작은 친구를 보며 웃었다. 자, 또 하루를 시작할 때가 왔다. 그러면 이제 건네야 하는 말은 딱 한 가지만 남았다.


당신의 치열함을 응원한다. 언제나 그렇듯,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신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나는 쭉 당신을 응원하며 사랑할테니 몰라도 좋으니 나아가길 바란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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