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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 Dec 26. 2022

괜찮은 날과 괜찮지 않은 날

코 끝이 빨갛게 익어버리는 계절이 왔다. 잠깐이라도 손을 내놓으면 얼어버리고 마는 탓에 얼른 겉 옷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어야 했고, 찬 바람에 얼어버린 얼굴과 눈은 너무 시려서 짠 기가 가득해져 버린다. 후, 숨바람을 뱉어내면 하얀 입김이 나온다.  

멍하니 서서 하늘을 바라봤다.


올해도 다 가버렸네.


괜스레 외로워진 탓에 발 끝을 툭 차버렸다. 발 끝 시선에 걸린 버스 정류장의 간이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걸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잠시만 앉았다 갈 요량이었다. 몇 대의 버스를 흘러 보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집으로 갈 수 있는 버스를 일부러 타지 않은 것이 몇 가지 된다는 정도뿐이다.

곳곳이 해져있는 신발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가장 낡은 마음을 가졌던 자신과, 스스로에게 색을 입힐 수 있게 된 작년의 자신, 상처가 가득한 그 틈새를 비집고 흘러내리는 기쁨과 슬픔을 몸부림치며 받아들여야 했던 올해의 자신을 떠올렸다. 가슴 한 켠에 묵은 숨을 토해내며 미지근한 웃음을 지었다. 기뻐서 웃는 것도 아니고, 슬퍼서 웃는 웃음도 아니었다. 아주 깊은 곳까지 숨을 끌어내리고 눈을 감았다. 온몸의 뼈가 열리는 듯한 감각을 가만히 느꼈다.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열망들이 툭, 툭 하나둘 씩 터져 나간다.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로 빠르게 퍼져버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숨을 다 토해내고 나서야 깨닫는 것은 그동안 꾹 눌러두었던.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어떤 것들이 결국 피워내지 못해 져 버리고 마는 순간임을 알았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야 했고,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했어야 했고, 사랑을 해보려 했었던 것이 다였다. 망각을 품어 다시 살아가는 것을 되풀이하는 과정이었다. 무엇에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된다.


무엇을 더 해야 했고, 덜 해야 했는지의 차이는 있겠지.


사랑스럽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빼곡하게 기억하고 있기에 괜찮다는 것을 인지해야 했다.

가장 낡은 마음을 가졌던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툭 하고 흐르는 눈물 위로 남은 숨을 놓았다. 남겨둔 마음에 대한 서러움인지, 안도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한참을 울었다. 눈이 따가워 뜨는 게 힘들 정도로 울고 나니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몇 분을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이제는 어디에 마음을 둬야 할지 살짝 모르게 됐다.


선생님이 그랬다. 괜찮은 날과, 괜찮지 않은 날의 반복일 것이라고.

그러니 너무 많은 것을 정의하거나 강박을 갖지 말라고.


연말이라는 단어를 빼고, 오늘은 괜찮지 않은 날로 치부하기로 했다. 좀 길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엔 들지 않지만, 또 다시 괜찮은 날로 돌아갈 것을 알기에 조금은 내버려 두기로 했다.


마지막 눈물을 닦아내고, 저 멀리 다가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일어났다.

언젠가,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괜찮은 날을 넘어서 행복한 날이 있는 날이 오기를.

그런 날에 나에게도 집이 생겨서 돌아가기를.


행복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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