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코로나, 내 삶에 쉼표를 허락하다

그토록 바라던 쉼표를 코로나가 대신 찍어주다  


“하, 단 하루만이라도 혼자 있으면 좋겠다." "여보, 우리 여행이라는 걸 다시 갈 수는 있는 걸까?" "나 어디 무인도라도 가서 3일간 실컷 자고 오면 좋겠어." "지금 이 출근길이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발걸음이면 진심 좋겠는데..." "나 오늘 진짜 말 너무 많이 했어. 목 아파. 며칠 동안 말 좀 안 하고 싶다, 은행을 그만둬야 가능하겠지?"

내 인생이 코로나라는 놀라운 변수를 만나기 직전까지 내 입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말들이다. 코로나 직전 이미 몸과 마음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던 상황이다. 온 마음 다해 간절히 쉼을 원하고 있던 나인데 눈을 떠보니 어느 순간 나는 모든 것과 차단된 채 홀로 쉼 속에 있다. 비록 내가 원하던 모습의 쉼도 아니요, 그 차단 속에 보고 싶은 내 아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게  반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라는 녀석이 내 인생에 쉼표를 딱 찍어줬다. 때로는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했던가? 지금 내 상황이 딱 그 격이다. 인생 참 재미나지.


나는 모태신앙이다. 어려서부터 내 인생 순간순간에 닥쳤던 어려움들을 늘 신앙으로 극복했다. 어릴 적부터 축복은 고난이라는 포장에 싸여 온다는 말을 믿었고, 언제나 감당할 시련만 주심을 믿으며 안개 같은 인생길을 열심히 헤쳐왔다. 그래서일까, 내 주위에는 유독 비기독교인들이 많지만 내 삶을 통해 내가 믿는 신을 어렴풋이 알고 인정해 주는 친구들도 많이 있다. 이번에 내가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고 했을 때 나의 인생친구들은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했다. "킴(나는 그 흔한 김 씨이다), 하나님 믿는 거 다 알고 인정해 줄 테니 그래도 이쯤 되면 우리 부적 하나 쓰자!"  "킴,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네가 코로나 확진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는 하나님인지 뭔지 전혀 모르지만 그 누구보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킴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건 킴이 믿는다는 하나님이 안 계시는 거 아닐까?" 그래 놓고 모두 다 이구동성으로 결론은 또 이렇게 냈다. "근데 킴, 사실 이 방법이 좀 엽기적이고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니가 믿는 신도 어쨌든 너에게 쉼을 주고 싶었던 거 아닐까? 방법이 굳이 이것뿐이어야 했나 싶지만 말이지. " 나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코.로. 나.라는  녀석이 내가 쉼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는지 시간이 흐른 뒤 오늘은 돌아보면 알게 되겠지.




얼마 전 한 방송에서 '청춘 다큐_다시 스물 : 커피프린스 편'을 방영했다. 사실 그 방송을 보지는 못했지만 친구들과의 톡방에서 이슈가 되어 알았다. 친구들 모두 드라마 제목만으로 자신의 젊었던 청춘을 회상했다.  그때의 내 나이 25살. '커피프린스'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2007년 그 뜨거웠던 여름날이 떠올랐다. 그 계절의 온도와 습도, 그때 내가 살던 집의 거실 풍경 등등 모든 것이 지나간다.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다. 왜냐하면 그때가 놀고먹던 날의 마지막이었으니깐. 대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로 들어서기 전, 졸업을 앞두고 취업으로 온갖 고민이 있었지만 돌아보니 그 후 인생을 살면서 닥치는 고민들에 비하면 그 때의 고민은 정말 종이 한 장처럼 가벼웠다. 물론 그때는 몰랐지만... 그 해 12월 나는 은행에 입사하게 되었고, 그렇게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경주마처럼 앞만 보며 달렸다. 한 번쯤 쉬어가는 타임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누군가가 정해놓은 기준에 맞춰 열심히 그냥 열심히 살았다. 굉장한 평범한 사람으로 말이다.


혼기가 찰 때 즈음 지금의 남편과 소개팅으로 만났고 첫 만남에서 알았다. 이 남자는 내 운명의 상대라는 걸! 몇 번의 만남이 계속될수록 나는 내 선택이 맞다고 확신했다.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적극적으로 대시했다. 남편을 만나기 직전, 사귀었던 남자와 헤어지면서 홧김에 중고차를 하나 샀었는데 그 자동차가 나의 비장의 카드였다. 데이트도 안 잡았는데 새벽같이 일어나 예쁘게 치장하고 남편의 집 앞에 가서 기다리고 데이트가 끝나면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열렬히 뜨겁게 사랑한 이 남자와 결혼을 했다. 남편은 잘 다니던 대기업을 퇴사했다. 이미 연애할 때부터 예상했었던 바. 남편은 회사를 다니면서 유학을 준비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혼생활 10개월 만에 남편은 영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혹시 그 사이에 아이라도 생기면 육아휴직을 빌미 삼아 같이 가고 싶었지만, 그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남편의 석사 코스는 일 년이었고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 남아 열심히 은행을 다니며 남편의 학업에 일조했다. 남들은 내 선택이 파격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주위의 시선과는 다르게 내가 불쌍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꿈이 있고 하고 싶은 게 명확해서 과감히 그 길을 선택하고 도전하는 남편이 부러웠다. 되려 남편과 달리 이 현실에 안주하며 하루하루 살아내는 내 스스로가 안타깝다고 느꼈다. 나도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왜 내게는 그런 게 없을까- 늘 생각했다.




남편은 석사를 끝내고 다른 나라에서 인턴을 거쳐 한국에 정착했다. 자신의 분야에 대해 끝없이 공부했고 새로움을 모색하며 정말 매 순간 열심히 살아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때마다 자신의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며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 총알을 비축해뒀다. 그에 비해 나는 하루하루를 그냥 열심히 살아냈다. 남편과 달리 엄청난 목표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어느 순간 내 목표는 잠깐의 휴식을 위한 육아휴직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렇게 바라던 아이도 내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어렵게 아이를 갖고 꿈에 그리던 육아휴직을 했다. 하지만 그 육아휴직 시간이 뭔가 내게 크나큰 힐링을 줄 거라고 생각한 건 엄청난 착각이었다. '나'라는 인간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OO이의 엄마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나를 위한 희망이 생길 거라는 착각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야 했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한 글자만 바뀌어
'희생'으로 내게 찾아왔다. 


내가 죽기 시작하니 아들이라는 꽃이 어여쁘게 피어났다. 그렇지만 좋았다. 아이라는 예쁜 꽃을 틔우며 사는 것이 행복했다. 어느 순간 꽃은 예쁘게 자라 어린 묘목이 되었고 어린 묘목은 평생의 효도를 다 하는 시기에 맞게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과 기쁨이 되었다.


그런 순간에도 남편은 자신의 꿈을 위해 회사를 다니면서 박사과정에 돌입했다. 그렇다고 남편이 집안에 소홀했느냐. 전혀 아니다. 남편은 더욱 가정적이고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며 그때만큼은 가족에게 전심으로 대했다. 저 사람 진짜 뭐지? 존경심을 넘어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아 뭔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남편이 늘 부러웠다. 언제가부터 느낀 남편과 나의 차이. 그건 과연 체력의 차이일까? 멘털의 차이일까? 남편은 늘 내게 말했다. 뭐든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적극적으로 말하라고. 자신의 모든 커리어를 잠시 중단하고서라도 나를 전적으로 지원할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나도 뭔가 말하고 싶은데 말할 게 없다. 나도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다고 격렬하게 말하고 싶은데 미치도록 하고 싶은 것이 없단 말이다. 사실 나라는 사람의 속마음 끝까지 가 본 적도 없다. 07년 그 겨울부터 지금까지 나는 앞만 보며 그냥 달렸다. 열심히 달렸다. 매일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나만의 모토 아래. 매일매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나를 보니 풍요 속에 빈곤처럼 알맹이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가장 강력한 나만의 한 방을 지금까지 만들지 못한 것이 괜스레 아쉽다.


그래서 지금, 우연히 만난 이 쉼이 놀랍도록 소중하다. 물론 코로나 확진 후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가운데 있다 보니 쉽게 지치고 집중력의 한계가 때론 느껴진다. 하지만 이것을 이겨내고 나라는 사람의 속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지금의 시간이 정말 감사하고 좋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앞으로는 어떤 삶을 살아내고 싶은지, 내 삶의 이정표와 목표를 다시금 정립할 수 있게 시간이 확보되어 무엇보다 좋다. 같이 놀아달라고 한없이 달라붙는 아들이 미치도록 그립지만 또 그 아들이 없음으로 해서 진짜 내게 집중할 수 있다는 이 아이러니함!




정말로 얼떨결에 쉼을 선물로 받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격렬하게 이별하고 싶은 코로나라는 녀석으로부터 말이다. 쉬어가는 김에 찬찬히 나를 살펴보려고 한다. 13년 전부터 나 좀 제발 봐 달라고 요청하는 나 자신을 세밀하고 면밀하게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쉬면서 느끼는 지금의 감정들을 글쓰기를 통해 토해 내보려 한다. 코로나 덕분에 글쓰기라는 돌파구를 선택했고, 글을 쓰니 잡생각이 없어지고, 어릴 때부터 일기 쓰기 좋아하는 여자는 진중하게 책상에 앉아 일기 쓰듯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현재 주어진 갑작스런 쉼에 감사하며 글자들과 조금 더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고맙다, 코로나야! 센터에서 여섯째 날을 보내면서 처음으로 코로나에게 조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전 08화 코로나, 녀석이 나를 책상 앞으로 불러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