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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다

  불확실이 주는 두려움 앞에서 가장 확실한 사랑을 느끼다


깜깜했던 핸드폰 화면이 환하게 빛난다. 전화가 들어왔다. 무음 모드로 해 놓은 핸드폰 화면에는 'Lovely mom'이라고 뜬다. 엄마네?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코로나 확진을 받고 내가 이 곳에 입소한 후로 하루에 세 번씩 전화하는 엄마다. 센터에 입소한 초반에는 나 또한 마음이 불안해서 매일 하는 엄마와의 전화에 위로를 받고 평안을 얻었다. 그렇게 매일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내 마음은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엄마는 지금의 불확실성에 대해 나날이 불안감을 느꼈다. 자가격리 중인 사위와 손자 또한 코로나 음성 결과가 나왔지만 자가격리가 해제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는 불확실 앞에 자꾸만 마음이 동요된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뉴스만 틀면 나오는 코로나 뉴스가 자신들과 관계가 없거나 먼 일처럼 느낀다. 나도 그랬고 우리 부모님 또한 그랬겠지. 그러나 본인들의 딸이 코로나 확진을 받고 어딘가에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에 그 후로 마음 편하게 못 지내고 계셨다. 특히 엄마는 워낙 소녀같이 여려서 작은 일에도 마음이 쉽게 요동치는 편인데, 세상을 들썩이는 뉴스가 우리 가족일이 되었으니 오죽 속상하고 답답했을까.


"어~ 엄마, 나 괜찮다니깐 또 왜에~?” 라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나. 엄마가 말했다. "우리 딸 지금 어디에 있어?" "어디에 있긴 방에 있지. 지금 글 쓰고 있어." 나는 한창 브런치에 올릴 글감을 떠올리고 이제 막 노트북 앞에 앉은 찰나였다. 엄마가 말했다.

"어, 그래~ 딸,
우리 지금 네가 있는 센터 앞에 있어."


너무 놀랐다. '뭐라고? 여기 면회가 일절 금지된 곳인데 이게 뭔 소리지?' 하고 창가 쪽으로 달려갔다. 창 밖 풍경에 너무 놀랐다. 작은 오솔길 사이에서 나의 부모님을 발견하고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나는 반갑게 오른손을 들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센터 생활수칙 중 하나로 베란다 출입금지도 있어서 부모님께 손을 흔드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엄마 나 보여? 나 지금 여기 손 흔들고 있는데! 아빠~~~ 안녕?!!" 하고 나는 소리쳤다. 우리 부모님은 한참이나 내 쪽을 응시하더니 그제야 나를 발견했는지 "어어, 어어, 우리 딸 보인다, 보여! 여보~ 이리 와 봐, 저기 OO가 손을 흔들고 있어!!"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아빠가 엄마의 얘기를 듣고는 내 쪽을 바라본다. 아빠도 내 모습을 발견했는지 반갑게 손을 흔든다. 세상에 이런 안타까운 순간이 있나. 마치 감옥살이하는 죄수 딸을 만나러 온 것 같은 이런 영화 같은 장면이라니! 사실 지금 내가 코로나 옥중살이 중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빠 엄마와 좀 거리를 두고 경찰 한 분이 이 영문모를 상황에 대해서 계속 응시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겠지. 예전에 코로나 확진자가 병원에서 탈출했다는 뉴스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이 있어서일까. 우리 센터 앞에도 매일 경찰차 안에서 경찰들이 순번을 돌며 지키고 있다.




"아니, 엄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여기는 찾아온 거야? 차 끌고 왔어? 여기 어떻게 왔어?" 너무 놀라 폭풍질문을 하는 내게 엄마는 울먹이며 말했다. "응, 우리 딸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너무 궁금해서 아빠랑 산책 삼아 한번 와 봤어. 차는 안 끌고 그냥 지하철 타고 왔어. 운동도 되고 좋네. 역에서 걸어서 한 15분 정도 걸린 것 같아. 딸, 여기 경치가 참 좋다. 우리 딸 좋은 곳에 있어서 엄마 마음이 놓이네~" 나도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았다. 내가 뭐라고 여기까지 힘들게 찾아왔는지, 또 한편으로는 내가 잘 있는지 얼마나 눈으로 확인을 하고 싶었겠나 하는 마음에 속이 많이 상했다. 어느덧 내 나이도 서른여덟이고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이제는 아들도 있는 어엿한 부모이기도 한 나인데, 나의 부모님 눈에는 여전히 내가 품 안에 자식이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인 것이다. 오늘 아침에 엄마와 통화를 할 때 엄마가 그랬다. 아빠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많이 울었다고. 큰딸 생각에 꾹꾹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아빠를 보니 마음 약한 엄마도 같이 울었다고 했다. 그때 나는 갑자기 옛날 일이 떠올랐다.


한창 결혼해서 신혼재미에 푹 빠져있던 어느 주말, 갑자기 엄마가 내게 전화해서는 급히 집에 좀 와야겠다고 했다. 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싶었는데 그 대단한 일이라는 걸 듣고 엄청 울다 웃다 했었더랬지. 얘기인즉슨, 내 방을 청소하려고 들어갔는데 내 방 침대에 앉아서 혼자 울고 있는 아빠를 발견했단다. 왜 우냐고 했더니 큰딸이 너무 보고 싶어 울었다는 아빠.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아빠가 많이 적적해하니 집에 좀 와보라는 엄마의 전화였다. 사실 내가 그렇게 애교 많은 딸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빠와 내가 드라마에 나오는 것 마냥 친구처럼 엄청 사이좋은 부녀도 아니었다. 맏이면서 아들 없는 집의 장녀이다 보니 언제나 똑 부러지고 든든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 아래 아빠 엄마에게도 직언을 하고 집에서 무게감 팍팍 갖는 딸이었는데 막상 그런 딸이 시집을 가고 집에 없으니 유난히 아빠가 많이 적적해했단다. 그 후로도 엄마의 그런 전화에 친정집에 몇 번 달려갔던 일이 떠오르니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우리 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직접 찾아와서 딸 모습을 눈으로 보니깐 많이 안심이 돼~ 네가 글에 썼던 밤나무도 여기 크게 있구나!"라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에서 큰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살면서 우리는 불확실성 앞에 번번이 무릎을 꿇는다. 불확실이라는 놈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력을 나타내는지 모른다. 나의 엄마도 불확실과 맞서 싸우는 중에 딸이라는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목소리로만 듣는 딸이 아닌 눈 앞에 실존하는 확실한 딸의 모습을 봐야 안정이 되겠다는 생각에 아빠와 이 곳까지 직접 찾아와 봤으리라. 오면서도 혹여나 딸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코로나 확진을 받은 내 딸이 앞으로 어떤 후유증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슬픔, 자가격리 중인 사위와 손자 또한 격리 해제 시까지 위험 앞에 놓여 있다는 불안감,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게 우리 가족의 일이 되어 버리면서 다른 가족들에게까지 전파된 위기감 등 불확실성은 이미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숨통을 옥죄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 가장 확실한 '사랑'이 있다. 불확실성은 확실함으로 이겨야 한다. 나는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강력하게 믿는다. 사랑에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그중 가족 간의 사랑이야말로 대가도 없고 바라는 게 없는 가장 진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신과의 사랑을 제외하고 말이다.) 지금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은 매우 애석하지만 결국 사랑으로 서로 믿고 의지하며 극복해야 한다. 나는 여전히 미각 후각을 상실했지만 살기 위해 열심히 먹는다. 열심히 먹어야 코로나와 이별할 수 있을 테고, 그래야만 내 아들을 다시 만나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한없는 사랑이 때로는 부담스럽지만 이 또한 그들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부모님이 현재 내 곁에 계심에 너무나 감사한다.


내가 한창 육아휴직 중에 내 몸이 너무 아파서 짐을 싸 들고 아이와 함께 친정집에 간 날이 있다. 이미 임신 전부터 허리디스크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출산과 육아로 내 허리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허리를 못 쓰니 아이를 보는 게 너무 지치고 힘들어 내 몸 하나 살겠다고 친정엄마에게 달려갔다. 전화통화로 엄마에게 아이와 함께 친정집에 가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말했다. "아, 오늘 온다고? 알겠어. 원래 오늘 아빠랑 외할머니 뵈러 가려고 했는데 그러면 다음에 가야지 뭐~ 조심히 와!" 엄마는 본인의 엄마를 보러 가는 일도 마다하고 자신의 딸과 손자를 열심히 돌봐줬다. 그렇게 친정집에서 와서 며칠을 비볐다. 친정엄마가 모든 것을 다 해주니 너무나 좋았다. 그날도 엄마는 손자 목욕시키느라 한창 바빴다. 그 사이 이모에게 몇 통의 부재 전화가 와 있었다. 손주 목욕을 끝내고 부재전화를 확인한 엄마는 그 후 이모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심하게 오열했다. 밤중에 날아온 그 전화는 외할머니의 부고 전화였다. 그렇게 엄마는 외할머니를 뵈러 가야겠다는 계획을 완수하지 못한 채 외할머니와 이별하게 되었다. 그 날 이후 난 엄마에게 늘 미안함을 갖고 살게 되었다. 나만 그날 엄마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계획대로 외할머니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그 마지막 기회를 내가 빼앗은 것만 같아서 엄마에게 늘 미안했다.


그 후 어느 날, 퇴근을 하고 친정집에 가야 할 일이 있었다. 엄마가 만든 김치볶음밥이 너무나 먹고 싶어서 퇴근 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김치볶음밥을 요청했다. 집에 도착하니 계란후라이가 예쁘게 올려진 김치볶음밥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나를 반겼다. 손만 씻고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 내 모습을 식탁 맞은편에서 한참 바라보고 있던 엄마가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너는 엄마가 있어서 참 좋겠다."


라고... 그때 뭔가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 했다. 그랬다. 나는 엄마가 있어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요청할 수도 있고, 급한 일이 생기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를 맡길 수도 있었지만 우리 엄마에게는 이제 그런 엄마가 없다. 엄마의 마음속에 엄마는 남아있겠지만 언제나처럼 목소리를 듣거나 얼굴을 볼 수가 없으니 얼마나 애통할까. 그런데 나는 오늘, 멀직이 먼발치에서라도 딸의 모습이 보고 싶고 딸이 그리워서 먼 곳까지 나를 찾아와 준 엄마가 있다. 아빠가 있다. 그 사랑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사실 센터에서 맞는 일곱째 날인 오늘 아침부터 많이 우울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기까지도 굉장히 힘들었다. 코로나 확진 후 남편이랑 아들과 떨어져 있으면서 매일같이 아침마다 서로의 건강을 묻는 것이 우리들만의 필수코스. 그런데 오늘 아침 남편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어제까지 괜찮았던 그가 오늘 아침부터 발열이 난다고 했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미 머릿속은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가장 문제는 우리 아들. 정말 최악의 경우 남편까지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게 된다면 홀로 남겨져야 하는 내 아들 생각에 어렵게 찾은 평정심은 무너졌고 제발 그것만은 안 된다고 울면서 기도했다. 담당 공무원과 통화 후 오늘 오후에 남편은 코로나 재검사를 받았다. 이로 인해 양가는 비상이 걸렸고 모든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이다. 내일 오전에 나올 남편의 재검사 결과라는 불확실성 앞에 나는 무릎을 꿇지만 다시 한번 다짐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랑으로 이겨낼 거라고, 이길 수 있다고. 오늘 밤은 잠들기가 쉽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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