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나 스스로에게 해 주고 싶은 말
따르릉, 따르릉. 305호 내 음압병실에 전화벨이 울린다. 생각해보니 이전 생활치료센터에서는 306호였는데, 병원으로 전원을 온 나는 현재 305호이다. 내가 있는 층은 무려 8층인데 병실 호수는 305호라고 부른다. 마치 옆집으로 이사 온 것 마냥 신기하다. 나는 이 사실을 오늘에서야 인지했다. 혼자 피식하고 웃는다. 점심을 먹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내려와 전화기 쪽으로 몸을 옮겼다. "네~ 여보세요?"라고 전화를 받는 내게 상대방이 말했다. "네, OOO님이시죠? 담당 의사예요. 잠시 통화 괜찮을까요? 어제 검사했던 결과랑 이것저것 말씀 좀 드리려고요."
화요일에 처음 만났던 그녀와는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이다. 물론 오늘은 비대면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담당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OOO님, 어제 시행했던 객담(가래) 검사에서도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가 검출됐어요. 아직 양성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오늘 새벽에 시행했던 폐 엑스레이에서는 다행히 폐렴 소견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다만 일반적으로 시행하는 코로나 검사보다, 객담(가래)에서 검출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몸의 더 안쪽에서 발견되는 거라 아직 몸 안쪽에 바이러스가 남아있다고 보여져요. 하지만 현재까지 발열이 없고 폐렴 증상은 없어서 다행이에요."
"우선, 오는 일요일까지 현재 복약 중인 약을 지속해서 먹어보고 다음 주 월요일에 객담 및 코로나 검사를 다시 진행할 거예요. 그때 결과가 음성으로 나오면 하루 이틀 뒤에 다시 재검사를 할 거고, 거기에서 재차 음성이 나오면 퇴원 계획을 세워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음성이 나오더라도 현재 같은 증상이 지속된다면 퇴원은 조금 늦춰질 수 있다는 거 알고 계세요. 아드님을 오랫동안 못 봐서 많이 속상하시겠지만 마음 편히 먹고 주말 잘 지내시면 좋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바쁘실 텐데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감사인사를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약간의 실망감이 찾아왔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에 괜찮다고, 곧 더 좋아질 거라며 내 마음을 다독여줬다. 다시 자리로 와서 먹던 점심을 이어서 먹었다. 하지만 약간 입맛이 없어졌다. 결국 오늘 점심은 깨끗하게 다 먹지는 못했다. 식사를 정리하고 의료폐기물에 집어넣고 자리로 오니 책상에 올려둔 핸드폰에 낯선 휴대폰 번호가 뜬다. 평소 같으면 받지도 않을 낯선 번호지만 코로나 확진 이후 낯선 번호로 워낙에 전화가 많이 와서 요즘은 우선 받고 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인사부 OOO입니다." 그녀는 굉장히 반가운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다. 그녀는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작년에 허리디스크 수술로 인병휴가를 쓰게 되면서 4개월가량 자주 통화했던 회사의 인병휴가 담당 직원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처음에 내 이름을 듣고 설마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직원일까? 생각했다고. 그런데 정말 본인이 아는 그 직원이어서 적잖이 놀랐다고 했다. "네네, 많이 놀라셨죠? 어떻게 또 이런 일로 우리가 통화를 하게 되네요."라고 내가 대답했다. 그녀는 어제 발송한 코로나 양성 판정 확인서를 지점을 통해서 오늘 받았다며, 오늘자부터 코로나 인정휴가가 인병휴가로 전환되는 내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감염경로는 어떻게 되는지 아시느냐, 가족들은 괜찮냐, 아드님이 확진되지 않았다니 정말 다행이다, 격리되어 계셔서 많이 답답하실 텐데 아픈 거 외에 불편하신 것은 없느냐 등등 그녀는 모든 이들이 나와 통화할 때 궁금해하는 내용에 대해 똑같이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왠지 은행에서 감염이 된 게 아닐까요. 워낙에 지점에 많은 고객들이 오고 가니깐요. 요즘 무증상 감염자들도 엄청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작년에 허리 수술하시고 그 후에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필요할 텐데 이래저래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이셨으니....."
뭐 이미 허리 수술을 한지도 일 년 육 개월이나 지난 시점인데 그녀는 내게 그렇게라도 위로를 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어쨌든 빠른 쾌유를 빈다며, 중간에 변수가 생기면 언제든 전화를 달라는 그녀와 통화를 종료한 후 답답한 가슴을 잠시 식히려고 나는 창 쪽으로 다가갔다. 창밖에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푸른 산이 서 있다. 언제나처럼 모든 걸 다 품어줄 테니 너의 속마음을 이야기해 보라고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간간히 빨갛게 물들어 있는 초록물결의 산이 오늘따라 좀 더 차분해 보였다. 햇살에 빛나던 찰랑찰랑한 이파리들도 오늘은 팔을 전부 내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흐린 날씨 탓인지, 아니면 내 마음이 반영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한참 산을 바라보는 중에 내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스프링클러. 내 병실 앞 건물 옥상에 스프링클러 여러 대가 작동되고 있었다. 옥상 전체는 작은 식물들로 가득했다. 내가 이 곳에 입원한 후로 스프링클러가 작동되는 건 처음 봤다. 아마도 매주 금요일마다 식물들이 샤워를 하는 날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놀랐던 건 이미 저 스프링클러가 5시간째 물을 뿌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침 일찍 한 남자가 옥상에 올라와서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는 모습을 봤는데, 스프링클러가 작동된 지 벌써 5시간이 훌쩍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저렇게 계속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도 될까? 담당자가 스프링클러의 존재를 잊어버린 건 아닐까?' 하며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맞아, 예전에 아빠가 말했었지. 식물한테 여러 번 물을 조금씩 주는 것보다 한번 줄 때 흠뻑 주는 게 더 좋다고. 그래야 식물이 쑥쑥 클 수 있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 지금 내게 찾아온 이 시간이 나를 한껏 더 성장시킬 수만 있다면, 이 빗줄기를 온전히 받아들이리라. 빗줄기에 나를 흠뻑 적시리라. 온몸이 덜덜 떨리도록 내 몸을 빗줄기에 맡겨보리라. 흠뻑 젖고 나는 다시 힘껏 일어나겠노라. 누군가는 내게 흠뻑 쏟아지는 빗줄기가 고난의 빗줄기라 말할지 몰라도 나는 이것을 축복의 빗줄기라 부르겠노라고.
갑자기 그날이 떠올랐다. 벌써 13년째 몸담고 있는 이 은행에 입사지원서를 내고 서류통과 문자를 받고 설레었던 날. 그 후 직무적성검사를 치르고 운이 좋게 합격하여 1차 면접을 보게 되었다. 1차 면접은 실무진 면접으로 12명이 한 조가 되어 들어가고 차례로 들어오는 질문들에 대답을 하는 면접이었다. 그 당시 유행은 압박면접이었다. 조의 1명 이상이 희생양이 되던 그런 면접이었는데 우리 조 희생양은 하필이면 나였다. 나에게는 대학교 4학년을 앞두고 잠시 휴학을 하고 노량진에 들어가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시절이 있었다. 1년이라는 기한을 두고 호기롭게 시작했는데 기한이 다 되도록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나는 과감히 접었다. 시험의 늪에 빠지지 않겠다며 다시 복학을 했고 마지막 4학년 졸업반 전에 예비 졸업생으로서 취직을 꿈꾸고 있었다.
내 옆에 면접자한테는 "취미가 네일아트네요? 직접 할 수 있다는 건가요? 배운 건가요?"라는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던졌으면서, 내 차례가 되어 덜덜덜 떨고 있는 내게 실무진이 물어봤다. 이력서를 한참 보더니 "휴학을 1년 했었네? 휴학하고 뭐 했어요?"라고 물었다. 당연히 예상했던 질문이어서 나는 당당하게 "잠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습니다."라고 말했고, 갑자기 실무진이 훅 들어왔다. "공무원 시험? 공무원 시험 결과가 안 좋았나 보네요? 그러니깐 이 자리에 있겠지만. 그런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는 건 안정적인 삶을 꿈꾼다는 거 아닌가요? 우리는 그런 사람 원하지 않아요. 우리는 도전하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사람을 원해요. 은행원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 주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겠지만, 여기는 경쟁이 치열한 곳입니다. 안정이 보장되려면 열심히 퍼포먼스를 내야 해요. 은행에 지원한 동기가 뭐죠?"
면접을 앞두고 누구나 지원동기에 대해 수없이 생각하고 그 대답을 수없이 연습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런데 실무진이 공격적으로 내게 쏘아대는 그 상황에서 순간 내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었다. 준비했던 대답을 제대로 해냈었는지조차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그 방을 나오면서 울음이 터지려고 하는 걸 입술을 꾹 깨물어 겨우 참고 엘리베이터를 탔던 기억이 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아빠에게 면접 잘 봤냐고 전화가 왔다. 아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참았던 울음이 터지고 면접 완전히 망쳤다면서 기대하지 말라고 아빠에게 하소연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렇게 은행에서 나와서 집까지 걸어갔다. 걷는 동안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스스로에게 느끼는 자괴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왜 하필 내가 압박면접의 대상이 된 건지 억울했다. 정말 잘할 수 있었는데, 준비했던 것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 속상하고 답답했다. 기회는 한 번뿐인데 그 기회가 제대로 날아가서 억울했다. 면접 본다고 정성스레 신경 써서 했던 화장은 이미 엉망이 되었다. 마스카라는 죄다 번져서 얼굴에는 검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길 가던 아주머니가 나를 붙잡고 무슨 험한 일이라도 당했는지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날 날씨가 참 화창하고 좋았는데 내 머리 위로는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그 빗줄기를 받아냈다. 우산 하나 없이 흐르는 빗줄기를 맞으니 아팠다. 마음은 쓰리고 몸은 너무 아팠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면접 후유증으로 힘들어했다. 면접을 망친 것 때문에 꿈까지 꾸며 다친 마음을 추스르느라 힘들었다. 하지만 다시 힘을 내서 이력서를 써야 했다. 취업공고들을 찾아보며 지내는 중에 놀랍게도 1차 면접 합격 통보가 날아왔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서 몇 번이고 문자의 글자들을 다시 읽었다. 몇 번을 읽어도 합격이라고 쓰여있었다. 날아갈 듯이 기뻐했고 나는 그때부터 독기를 품고 다음 면접을 준비했다. 결국 나는 은행에 최종 합격했고, 연수원에서 합숙하며 연수를 받는 기간 동안 100명 가까이 되는 동기들 중에 반장이 되어 전체를 통솔했다. 그 후 지금까지 매일 욕하면서도 은행이라는 곳에 출근을 하며 은행원으로서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빗줄기에 흠뻑 젖는 그 시간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 빗줄기에 흠뻑 젖는 동안 내 마음은 바닥을 치고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작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벌벌 떨며 울고 있는 또 다른 나에게, 그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내가 다가가서 위로를 건넨다. 따뜻한 포옹으로 작은 어깨를 감싸준다. 내 영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스스로에게 위로를 받는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세상에 나만큼 내 자신을 믿어주고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나는 지금도 내게 말한다.
‘괜찮아, 지금 지나가는 터널이 조금은 길지만 나는 완주할 수 있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어. 이 길 끝에 찬란히 빛나는 햇살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고. 그러니깐 조금만 더 힘내자. 나를 흠뻑 적시는 이 빗줄기로 인해 나는 더 커다란 나무가 될 거야. 내 뿌리가 온 힘을 다해 빗줄기를 빨아들일 때 내 가지는 더 견고해지고 이파리들은 더 무성해질 거야. 나는 더 많은 그늘을 만들어 낼 테고 그러면 온갖 새들이 내게 와서 쉬었다 가겠지. 세찬 빗줄기가 조금은 아프지만 이 비가 끝나고 나면 나는 아름다운 과실을 맺게 될 거야. 그러니 힘내.'
병원에서 맞는 열 아홉번 째 밤을 보내면서, 오늘도 나는 내 영혼에게 작은 위로와 큰 사랑을 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