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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천윈루에게

대만드라마 <상견니>에 대한 소소한 생각

단순히 고등학교 청춘물인 줄 알았다. 너무나 좋아해서 몇 번이고 다시 봤던 ‘말할 수 없는 비밀’이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처럼 영화가 끝난 뒤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게 피어올라 몸 어딘가가 간지럽다고 느껴지는 그런 달달구리한 류의 영상물이라 생각했다. 코로나 확진자가 되고 한 달 가량을 격리되어 치료받으면서 남편이 챙겨줬던 노트북은 사실 글을 쓰는 용도로만 거의 사용했다. 영상물도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만 볼 수 있다는 걸 병원에서 처음 알았다. 친구들은 쉬어가는 김에 푹 쉬라고 얘기했지만 그 멍때리기라는 것이 내게는 전혀 쉽지가 않았다. 언제 코로나 음성 판정을 받아보나- 한없이 그런 생각에 몰입되어 있던 내게 드라마나 영화는 다른 세상의 소유물이었다.


퇴원을 앞둔 몇 시간 전, 그제서야 내 마음은 연두부처럼 야들야들해졌다. 그 전까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문 같던 내 마음은 퇴원을 할 수 있는 확률이 90%에 가까워진 상태가 되어서야 커다란 빗장을 풀었다. 처음으로 마음편히 넷플릭스에 접속했다. 여러가지 다양한 영상물들이 띄워진 가운데 내 눈길을 끄는 것 하나가 있었다. 대만 드라마 <상견니>. 처음 들었던 생각은 제목이 뭐 이래? 상견례도 아니고 '상견니'? 대만 영화는 본 적이 있어도 드라마는 본 적이 없어 선뜻 클릭하기가 어려웠는데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1화를 본 나는 급격하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




"니가 보고싶어."라는 뜻의 대만 드라마 <상견니>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벌어지는 일종의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이다. 두 남녀의 인연에 얽힌 비밀을 추리해 가는 시공초월 로맨스가 가득한데 똑같이 생긴 전혀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다는 설정 자체가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시공간을 오가는 미스터리 추리물로서의 서스펜스까지 더해지면서 극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몰입도가 상당히 남다르다. 시공간을 초월할 때 매개체가 되는 음악은 실제 대만에서 90년대 흥행했던 곡으로, 드라마 정주행 후에 어느 순간 매일 같이 그 노래를 플레이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처럼.


로맨스가 밑바탕이 되고 그 안에 추리, 스릴러, 가족, 사회문제 등이 완벽히 녹아들면서 최근 몇 년간 봤던 드라마 중에서 각본, 연출, 배우(남녀 주인공 모두 1인 2역)들의 연기력까지 삼박자가 아주 완벽한 몇 안 되는 ‘인생드라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퇴원 후부터 지금까지 정주행만 4번을 했으니, 상견니에 미친놈이라는 말에서 나온 '상친놈',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나이다.) 드라마 <상견니>는 1998년과 2019년에 사는 남녀 주인공이 카세트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하나로 타임슬립을 하며 서로의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큰 줄기이다. 작은 단서 하나조차 너무나 소중한 퍼즐조각이라서 드라마의 큰 줄기만 말할 수 있는 기묘한 드라마.


2019년 타이베이의 IT회사 마케팅 팀장인 '황위쉬안'과 1998년 타이난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천윈루'. 두 사람의 겉모습은 완전히 똑같지만 나이,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언제나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황위쉬안'과는 정반대로 '천윈루'는 소극적 성격의 끝판왕이자 내성적 성향을 가진 소녀이다.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비행기 사고로 한순간에 잃게 된 '황위쉬안'은 이미 2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와의 추억을 잊지 못해 괴로워 하며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친구의 고등학생 때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에서 그 옆에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있는 한 소녀를 발견한다. 분명 자신은 아닌데 자기 모습과 똑같은 소녀의 모습에 놀란 '황위쉬안',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자신의 남자친구. 하지만 사진이 찍힌 대략적인 연도를 가늠해 볼 때 사진 속의 남자도 자신의 남자친구가 아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던 어느날, 그녀는 우연히 가수 우바이의 'Last Dance'라는 노래를 오래된 카세프 테이프를 통해 듣게 되고 1998년 '천윈루'의 몸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궁금해했던 그 사진 속의 소녀가 된 '황위쉬안'.


그렇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를 주는 타임슬립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세밀한 복선과 예측할 수 없는 전개, 배우들의 미친 연기력으로 이야기 속에 하염없이 몰입하게 된다. 게다가 사랑에 대해 각자가 한번쯤 느꼈을법한 아련하고 슬프고 그립고 외롭고 기쁘고 행복한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감독의 어마어마한 연출실력과 이 드라마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OST까지, 이 드라마 두 번 보세요- 세 번 보세요-라고 외치고 싶은 인생 드라마이다. 각각의 캐릭터 모두 다 사랑스럽고 마음이 가지만 나는 특히 ‘천윈루’에게 마음이 쏠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느꼈던 소소한 내 마음을 이곳에 담아보려고 한다.




1998년의 소녀 ‘천윈루'에게 내가 느낀 뭔지 모를 감정, 그건 무엇일까. 사실 내 성격은 드라마 주인공에 빗대어보자면 2019년의 '황위쉬안'과 상당히 흡사한데 내 마음은 왜 자꾸만 '천윈루'에게 향하는 것일까.


'천윈루'의 몸 속으로 들어온 '황위쉬안'의 외향적인 행동으로 소극의 대명사 '천윈루'의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조차 그녀의 변화된 모습에 푹 빠진다. 기존과는 다르게 상당히 밝아진 '천윈루'(몸만 '천윈루'이지 영혼은 '황위쉬안')는 주변에서 자기에게 주는 사랑과 관심이 당혹스럽고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가족 및 친구들에게 전적인 사랑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늘 한구석에 자리잡아 있던 '천윈루'는 어느순간 '황위쉬안'의 모습을 흉내내게 된다.


"재수없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지 마!"

"예전의 천윈루로 돌아가지 마,
 예전의 너는 진짜 재수 없었어!”


그러한 말들이 상처가 되면서 왠지 씁쓸하기만 한 천윈루.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자신에게 남동생이 묻는다. "왜 갑자기 예전으로 돌아갔어?"라고 묻는 질문에 "예전 모습은 싫어?"라고 되묻는 천윈루. 남동생은 대답한다. "그걸 말이라고 해? 겨우 누나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는데. 부탁이야, 재수 없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지 마!" 등굣길에 남동생에게 들은 말에 한없이 마음이 속상한 천윈루에게 친구가 묻는다.


"천윈루, 요즘 보면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아."라는 친구의 말에 "예전에는 안 좋았어?"라고 물어보는 천윈루. "당연하지! 전에 너 볼 때마다 되게 음침했어. 말도 잘 안 하고 다가가기에는 너무 멀어보였다니깐! 그런데 너랑 친해지고 나서보니 우리가 생각했던 거랑 다르더라. 얘기도 잘 하고 잘 어울리고 예전이랑 완전 달라. 너랑 있으면 재미있어! 어쨌든 말이야, 부탁이니깐 예전의 천윈루로 돌아가지 마. 예전의 너는 진짜 재수 없었어!" 그 말에 천윈루는 대답한다. "나도 너희처럼 예전의 내가 싫어!"라고 말이다.




'천윈루'는 몸 속에 갇힌 '황위쉬안'에게 말한다. "네가 나타나기 전에는 아무도 내게 관심도 없고 신경도 안 썼어. 그런데 요 며칠간 네 흉내를 안 냈더니 주변의 모든 사람이 어색해하고 다들 날 걱정하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네. 사실 기뻐해야 맞는데 그렇지 않아. 왜냐하면 그들이 신경쓰고 그리워 하는 건 내가 아니야, 바로 너지." 그러면서 천윈루는 생각한다. '너무 힘들어, 사라지고 싶어, 진짜 천윈루는 아무도 원하지 않아, 아무도 날 신경쓰지 않아, 너무 힘들어, 사라질래.'라고.


'천윈루'는 더 이상 주위에서 얘기하는 더 노력하면 상황이 달라지고 모든게 좋아질거라는 말에 신물이 난다.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고 신경 쓰이지도 않고 사랑 못 받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말에 지친다. 이미 많은 노력을 했는데 자꾸만 더 노력하라고, 더 나아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과 즐거워 해야지, 행복해야지, 예전의 천윈루로 바뀌면 안 된다고 말하는 말들에 모든 것이 끔찍한 악몽일 뿐이다. 사실 '천윈루'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건 세상에 대해 실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기대가 너무 많았기 때문인데 그 마음을 헤아려 주는 이가 없다.


갑자기 '천윈루'의 모습에서 스쳐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마치 그 아이가 '천윈루'로 환생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만큼 비슷했던 동창생 한 명. 그 아이는 언제나 혼자였다. 온 몸은 언제나 굳은 막대기처럼 딱딱해 보였다. 한 손에 실내화 주머니를 손에 걸고 늘 복도의 한켠으로 걸었는데 걷는 모습마저 로보트 같던 그 아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학교라는 울타리가 하나도 편하지 않았기에 그 아이에게 느껴지던 부자연스러운 아우라는 어쩌면 당연한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학교라는 공간이 그 아이의 온 몸과 온 마음을 굳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행동과 말투가 어눌하다고 느껴질만큼 그 아이는 '천윈루'처럼 늘 음침했다. 어둡고 조용했고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그 아이가 주변 친구들에게 피해를 준 것은 없다. 그저 학교 내에서 활달하고 씩씩한 아이들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존재감이 없었을 뿐. 한번은 그 아이의 입가에서 미소를 본 적이 있다. 내가 말을 걸었던 날로 기억된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나와 동생에게 왕따를 당하는 친구가 있다면 먼저 손내밀라고 매일 같이 말씀하셨다. 왕따 당하는 아이들의 외로움을 부추기지 말고 그 외로움을 안아주고 감싸주라는 조언을 늘 잊지 않았다. 엄마에게 하도 쇄뇌를 당해서일까, 몇 차례 그 아이와 말을 섞었던 적이 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대화가 생각나지 않지만 지금 와서 떠오르는 건 모나리자 미소 같은 엷은 미소였다. 그날 친구들이 다가와서 내게 물었던 말이 떠오른다. "너 쟤랑 친해? 쟤 왕따잖아. 너도 쟤랑 말 섞으면 왕따가 되고 말거야."라며 걱정 반 놀림 반의 내용이었다. 나도 왕따라는 건 당하기 싫었는지 그런 거 아니라며 그 아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들을 했었다. 그 아이와 나는 다른 아이라며 나름의 선긋기를 했던 나도 참 어렸고 어리석었다. 항상 마음 한켠에는 그 아이의 외로움이 안타까웠지만 다른 친구들의 손가락질이 싫어 외면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는 홀연히 하늘로 떠났다. 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그 소문에 꽤나 난리법썩이었다. 아무도 우리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서는 사죄하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원래 우울증이 있었다는 둥, 가정 환경이 불우했다는 둥,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소문들로 포장되어 우리들의 폭력은 그대로 묻혔다. '천윈루'는 말한다. "왜 너희는 내게 더 나아지라고 해? 왜 자꾸만 더 노력하라고 해? 너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어서 그래?"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왜 자꾸 스스로에게 밝음을 강요하게 만드냐고 반문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이미 병적으로 밝은 사람, 유쾌한 사람에 대해 집착하고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단 하나의 기질만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왜 다름에 대해 인정하지 못할까.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히 많은 별들 가운데 크기가 작은 별도 있고 큰 별도 있고 밝기가 강한 별도 있고 밝기가 희미한 별도 있다.


하지만 밝게 빛나지 않는다고 '저렇게 희미한 것은 별이 아니야!'라고 말할  있을까. 각자의 모습과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데  우리는  빛나는 존재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조금  관대하지 못할까.  모습 그대로를 나조차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이런 나를 사랑해 주기만을 바란다면  또한 욕심이 아닐까. 내가 꿈에서 혹시나 ‘천윈루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자기 스스로를  사랑해 주라고, 더 보듬어 주라고, 더 많이 격려해 주라고, 그게 최고의 사랑이라고!




나에게 인생작인 이 드라마는 올해 대만에서 9월에 열린 55회 금종상에서 여우주연상, 드라마상, 프로그램 혁신상, 각본상 등 총 4개의 상을 수상했다.  <상견니>가 프로그램 혁신상을 받게 되어 제작진이 나와서 수상을 했는데 그 수상소감이 너무나 따뜻해서 이곳에 기록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상을 세상의 모든 천윈루,
왕취안성, 모쥔제들에게 바칩니다. 어쩌면 자신이 빛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대들의 따뜻함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 반짝이지 않는 건 아닙니다!"


이 드라마는 사랑의 범위가 단순한 남녀간의 사랑보다 더 확장되어 있다. 드라마 정주행 후에 우리의 시선이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에게도 잠시나마 따뜻하게 머물를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드라마 <상견니>를 보고 난 후에 그대의 가슴은 살짝쿵 콩닥콩닥 거릴 것이며 이 글을 통해 놀라운 드라마를 알게 되어 기쁠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한동안 그대의 입가에는 다음과 같은 중국어 노래가 흥얼 거릴 것이다.


* 모든 정주행이 끝난 뒤에는, 꼭 <상견니>의 쿠키영상을 찾아보기를 추천한다:) 드라마가 끝난 아쉬움을 쿠키영상이 조금은 달래줄 수도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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