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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Jul 21. 2024

4. 외국인은 우산을 잘 쓰지 않는다는데 한국은

그날도 오늘처럼 부슬부슬 비가 왔다.



나는 비 오는 날마다 어려움을 겪는 반곱슬 소유자답게

앞머리 옆머리 뒷머리할 것 없이 날파리처럼 흩날리는 머리를 가라앉히느라 그날도 애를 먹고 있었다.


우산을 썼는데도 머리가 이 모양이네. 홀딱 다 젖은 것처럼  왜 이러는 거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기분 전환 겸 바닐라 라떼를 시켜놓고 미팅에 필요한 자료들을 주섬주섬 챙기도 있을 때였다.


그때 저 멀리서 커피숍을 향해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커피숍은 한 벽이 유리벽으로 되어 있어서 바깥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구조였는데

비 오는 날의 거리는 폭탄 머릿결로 우울했던 기분을 한 순간에 날려버릴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그런데 그 낭만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완성하는 피사체가 등장하였으니...

180이 넘는 키, 떡 벌어진 어깨,

다른 무엇보다 푹 젖었지만 '참 멋있게 젖었다'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 머릿결.




이런 느낌...



마크였다.

그는 카페 입구 작은 가죽 소파에 걸터앉아 산발의 머리로 커피를 홀짝이는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머리에 뭍은 비를 대수롭지 않게 툭툭 털며.

난 그 대수로움에 심술이 나 퉁명스럽게 인사했다.


"야 너 왜 우산을 안 써?"

"우산? 나 원래 우산 안 써."

"너 머리 직모라고 자랑하냐?! 난 우산을 써도 머리가 이 모양인데 넌 직모라고 지금 유세 떠는 거냐고!"

"왜 화를 내?!"

"나 머리 어제 했거든? 그것도 몇 십만 원을 주고서. 근데 이놈의 곱슬은 뭘 해도 비 오면 개털이야."

"아! 이제 알았다."

"뭘?"

"한국인이 우산에 집착하는 이유! the reason why Koreans are so obsessed with the umbrellas! "

"왓?! 집착? 뭔 소리야 위로는 못해 줄 망정."

"지난겨울에 눈이 예쁘게 오는 날이 있었어. 보슬보슬(drizzle) 참 예쁘게 내리는 날이었어. 근데!!! 정말 놀랍게도!! 한국인들이 전부 다 우산을 쓰는 거야!! It's ridiculous!"


그러니까 마크의 말은

옷에 묻은 눈의 경우 탁탁 털기만 하면 쉽게 털리는 것이 분명한데도

한국인들은 꼭 하늘에서 무언가라도 내리면 자신을 꼭 외부 자극으로부터 사수하겠다는 결심이 선 것 마냥 우산을 펴서 막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의 곱슬거리는 머리를 보고서 알게 되었다고 했다.


"Western hair is more thinner and easy to manipulate as opposed to Asian hair it's more thicker and once it gets wet it really deforms a lot."

(아시안들의 머리카락은 서양인들보다 굵어서 비나 눈을 맞아 망가지고나면 다시 원래대로 예쁘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


그래 일리가 있는 말이야.


"And I think Koreans care a lot more about their looks and hair than Americans."

"그래, 한국인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쓴다는 건 다 알려진 사실이긴 해."


근데!


"비 오고 눈 오면 당연히 우산을 써야 하는 거 아니야?? 한국인이 우산을 잘 쓰는 게 이상해? 니들이 안 쓰는 게 이상한 거지"

"그건 그래."


나의 강한 반발에 마크는 금세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게. 왜 우리(미국)는 우산을 안 쓰지?"

"미국인이라서 미국인이기 때문에 네가 정답은 아니잖아. 이제는 너도 한국인은 왜 그래라고 묻지 말고 한국은 이런데 우리(미국)는 왜 그럴까 하고 스스로에 대해 먼저 물음표를 띄우라고."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우리나라(미국)에서 파는 우산이 구려서인 듯."

"구려?"

"엉. 당장 봐. 한국 우산들은 튼튼하고 싸고 크고 패셔너블 하잖아. 근데 우린 안 그래."

"음. it could be. 그리고?"

"또? 어디 보자.. 글쎄."

"그냥 마크 네가 왜 미국에서 우산을 안 썼는지 생각해 보면 되잖아."

"그러네."


어휴 저거 하버드 나온 거 맞아?



앞에 놓인 커피와 케이크가 다 사라질 때까지도

우리는 오늘의 미팅 목적인 '신제품 마케팅 방향'에 대해서는 결국 결론을 짓지 못했다.

미국의 소비자와 한국의 소비자는 규모만큼이나 취향이나 소비 방향, 패턴이 매우 달랐다. 나는 마크의 날카로운 코멘트에 드래프트 종이 위를 몇 번이고 지웠다가 덧씌웠다.  

그는 또 다른 미팅을 하러 가야 했고, 나는 딸아이와의 약속을 지키러 가야 했다.


"광화문까지는 뭘 타고 가?"

"지하철."

"갈아타는 방법은 알지?"

"그럼. 네** 지도 어플을 깔았거든. 너무 좋아. 서울은 버스, 지하철 타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맞아. 전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대중교통이 이렇게 잘 되어 있는 나라는 없지."


!!!!


"아! 이제 알겠다."

"뭐?"

"내가 왜 미국에서 우산을 안 썼는지."

"?"

"나 미국에서는 운전만 했어. 버스 지하철 탈 일이 없었다고. 그러니 걷는 일도 없었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볼일 보고 나서 또 차를 타고 집 차고에 차를 넣으면 끝이야. 비 맞을 일이 없었던 거지. 그러니까 우산을 안 쓴 거야!"

"어!!! 그러네. 그럼 미국인들이 우산을 잘 안 쓰는 이유는?"

"대중교통이 그지(sucks) 같아서!!!"

"그럼 한국인이 우산을 잘 쓰는 이유는?"

"대중교통이 너무 잘되어 있어서 걸어 다닐 일이 많아서!!!"

"정답!"



이미지 출처 : 한국경제







몸과 마음을 갈아 만든 스타트업 <로즐린>이
벤처인증 이후 올리브영의 K-BOX 브랜드로 선정되면서 사업 차 한국에 방문하는 외국인을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덕분에 향 원료와 제품 제조, 마케팅 등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하는 중인데 일 말고도 외국인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또 다른 기회이자 도전이 되었다. 특히  이곳, 한국의 맨얼굴을 외국인의 입장에서 자주 마주하는 일은 많은 고민거리를 가져온다.

나에게는 일상이어서 익숙했던 것들이 그들의 관점과 시선에서는 신기하고 흥미롭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문화인류학 박사처럼 혹은 한국 문화 전문가 마냥 그들에게 한국과 한국인, 한국 문화에 대해 설명하며 나 또한 새로운 깨달음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중이다.

지금 한국은,
'인류애 상실'이라는 단어가 만연하고 서로를 혐오하고 증오하며 불쾌한 존재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지만 누가 뭐래도, 내가 겪고 느낀 바로는
한국만큼 안전하고 인정 많고 효율적이고 편리한 곳은 단연코 없다.

물론 복잡하고 스트레스 많고 경쟁적이고 때로는 너무 빨라서 그 속도를 따라기가 벅찰 때도 있다. 나도 한 때는 '한국은 싫어', '한국이 최악이야', '이래서 한국은 안돼.' 라며 자조하는 투덜이 스머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스스로 지옥이라고 명명하면 결국 지옥이 되는 법.

이 브런치를 통해 내가 가진 것, 내가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감사해하며
좀 더 긍정적으로 나와 주변을 바라보는 기록이자 기회가 되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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