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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Sep 11. 2024

한국의 술문화, 외국인에게 가르치기

  

"나 회식에 초대받았어."


마크가 짧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회의실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한국의 여러 문화 중에 회식 문화(team outing) 문화를 가장 궁금해했었다. 그런 그의 바람을 전해 들은 유통사 대표가 추석 전 직원 회식에 초대를 한 모양이었다.


"한국드라마에 보면 회사원들이 전문가처럼 막 고기 잘라 굽고 뒤집고, 소주랑 맥주랑 섞는데 막 거품을 내고 하는 거 그런 것들! 그런 거! 나 해보고 싶어."


스카이콩콩을 탄 아이마냥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오르는 그를 보던 나는, 있지도 않은 턱수염을 쓰다듬는 흉내를 내며 '이제 너도 한국 문화의 깊은 참맛을 알 때가 되었다'며 거드름을 피웠다.


"회식하면 나지, 내가 너에게 해 줄 말이 참 많겠다."


나는 자칭타칭 보수적이고 위계질서 심하고 세상 가장 늦게 변화의 바람이 온다는 곳에 근무한 지 10년이 넘은 직장인이었다. 마크가 말하는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그런 전형적인(typical) 회식 문화는 코로나 이후, 그리고 꼰대 문화라는 비판 아래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 추세지만 나에게는 현재진행형이었다.


출처 : 한국경제, 드라마 스토브리그 회식 장면


자, 들어봐. 한국 회식 문화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해줄게.


첫째, 가장 먼저 술자리 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어가서 숙취해소제(hangover helper)를 사 먹도록 해. 그럼 다음 날 숙취가 좀 덜할 거야.

둘째, 어른이 술을 따라준다고 하면 두 손으로 받아. 그리고 절대 바로 내려놓으면 안 돼. 먹기 싫어도 받은 술은 한 번  입에 댔다가 내려놓도록 해.

셋째, 어른 앞에서는 눈 마주치며 꿀떡하지 말고 반드시 고개를 30도 정도 돌린 후에 마셔.

넷째, 어른이 술병을 들고서 너에게 따라줄 것처럼 하면 넌 반드시 너의 잔에 남은 술을 다 마시고 난 후에 받아야 해. 남은 술 위에 새 술을 받는 것을 첨잔이라고 해. 그건 금기시(taboo)되는 행위야.

다섯째, 어른 앞에서는 자작(self pour)하지 마. 자작하면 너 앞에 앉은 사람에게는 불운이 따르거든. 욕먹기 싫으면 조심해.

섯째, 만약 어른과 건배를 하게 되면 꼭 그 어른 잔보다 낮은 위치에서 짠을 해야 해.


그리고 일곱째, 술잔... 응? 

마크 그 표정 뭐야? 죽고 싶다는 표정이네? 회식 가는 거 취소하고 싶다고? 한국 술 문화 배우고 싶다며. 그럼 이 정도는 기본이야. 몰라? 한국은 동방예의지국, 유교의 나라. 장유유서. 어른이 위. 너는 아래. 무조건 까라면 까야지.


 출처 : GS25 페이스북







회의 차, 미팅 차, 갖은 차차차차의 이유들로 마크와 다니면  끊임없이 물음표 살인마가 되어 나를 공격했다.


"내가 말이야. 미국 가기 전에 순댓국을 한 번 더 먹고 싶어서 혼자 국밥집을 갔단 말이야. 그런데 모든 테이블이! 세상에 남자들이 다 한 명씩만 주르륵 앉아있는데! 마치 시험 보는 학생들처럼 말이야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표정으로 앉아서. 아니, 혼밥 하는 거 익숙하지. 다른 거 때문에 엄청 놀랐다니까. 글쎄 모든 테이블에 초록색병이 놓여있더라고!! 정말 예외 없이 모오오든 테이블에 소주병이 말이야. 마치 한국인이 집단으로 알코올 중독에 빠진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니까. 왜 그러는 거야? 이유가 있는 거야? 이것도 한국의 전통문화야?!" 


"그것은 그냥 그것이 맛있기 때문이지. 한국에는 프랑스 와인 못지않은 페어링 문화가 있어. 파전에는 막걸리, 삼겹살에는 소주, 마른오징어에는 맥주, 두부김치에는 막걸리, 수육에도 막걸리, 양꼬치에는 칭다오. 순댓국에 맥주? 막걸리? 와인? 절대 어울리지 않지. 순댓국을 먹는 순간 입이 부르는 술이 있어. 그게 바로 소주야. 이유 없다니까. 그냥 본능이야."

   

역시 한국은 본능적(knee jerk)이야.


마크는 그 한마디로 모든 게 이해되었다는 듯이 물음표 쏘기를 중단했다.








그런데 말이야 마크.

한국에서는 말이야. 회식 같은 꼰대 술문화도 있지만


해가 지는 시간, 붉게 물든 노을에 괜히 울적해질 때

한강 주변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아

편의점에서 4개에 만원 하는 맛도 향도 다른 맥주를 사서

노가리, 새우, 먹태 등 종류별로 갈아 넣은 과자를 안주 삼아

한 모금 두 모금 홀짝할 수 있는


그런 낭만적인 술 문화도 있어.


아주 늦은 야근을 끝내고

으슥한 골목길 안에 퍼런 천막을 젖혀 들어가면

불편하다 못해 부러질 것 같은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그 위에 말라비틀어진 오이와 당근을 주는 아주머니가 물으면 '여기 잔치국수 한 그릇과 소주 한 병 주세요.' 해.

그리고 청승맞게 눈물 한 두방을 뚝뚝 흘리면서 매콤한 고춧가루를 푼 멸치국물에 코를 묻어 먹는 거지.


너희는 그런 거 못하잖아.

비닐봉지 밖으로 술병만 보여도 경찰이 쫓아온다며

아니 술을 꼭 술집에서 먹어야 해?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니? 서양인들 문화인인 척, 낭만가인 척은 다 하면서 노을빛 맥주 한 잔과 포장마차 소주 한 잔도 없이 살다 죽는다니 세상에나.


야외 공연 보면서

맥주 한 잔에 치킨 뜯는 거 그거 얼마나 맛있고 행복한데.

그런 행복을 모르다니 정말 불쌍하고 불행하다.



근데 왜 한국은 자살률이 세계 1위냐고?

왜 출산율이 꼴등이냐고?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다.

바쁘니까 그건 내일 얘기하자.

 어제도 그제도 야근했거든.

그리고 오늘도... 야근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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