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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da Apr 20. 2022

보이지 않는 단어와 친해지기

자신을 향하는 단어들

날 위한 최선이 뭔지는 모르지만
내 딸을 위한 일은 본능으로 알아요
...
하지만 날 부정하며 산다면
무슨 엄마 자격이 있겠어?


아이도 남편도 잠든 어느 밤, 오랜만에 넷플릭스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그날 오전에 인터넷 검색을 하다 사울 레이터라는 사진작가의 작품을 보았는데, 이 영화의 시각적 원칙을 그의 작품을 참고했다고 해서 보게 되었다. 영화 <캐롤>이 개봉했을 때에 영화관에서 보다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이 들었던 기억만 있었다. 러닝타임 118분. 밤 11시 즈음부터 보기 시작해 짧지 않은 영화임에도 아주 명징한 정신으로 끝까지 보았다. 육아의 고단함이 가실만큼 너무도 좋아 끝나고도 한참을 거실에 앉아 있었다.

  

영화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남편과의 양육권 분쟁 재판 장면이 나오는데, 주인공 캐롤 에어드는 스스로 양육권을 포기하며 글의 처음에 써둔 대사를 말한다. 무엇보다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겨우겨우 삼키어 내고 두 번은 말하지 못한다며 하려는 말을 차분히 내뱉는 모습에서 나는 삼켜내지 못하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기에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딸의 양육권을 두고 자신이 유리한 고지에 설 수도 있는 재판 상황이었는데도 아이를 포기하는 걸 감수해내는 어렵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고 되려 명확하게 인식하고 딸을 위하는 일이 무엇인지 본능으로 아는 엄마의 선택을, 캐롤의 선택을 나는 진심으로 존중한다.


최근 한 두 달 사이 나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체성'과 결이 닮아 있는 단어들을 많이 접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해 본 줌으로 만난 '엄마로 시작해, 나로 끝나는' 책모임, 엄마가 된 뮤지션들이 만든 앨범 '엄마의 노래' 속 음악이야기, '개인의 시대'라는 주제로 창간호를 낸 IVE 매거진의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 영화까지... 다른 형태의 것들이지만 내게 다가오는 큰 목소리는 이러한 것들이었고 소리 내어 읊어본다.


본능, 정체성, 자존감, 인격, 존중, 인정, 나다움, 고유함, 자유, 가치


내가 경험했던 형태의 것을 짧게나마 전해주고 싶다. 5주간의 책모임에서는 나와 대등한 존재로서 아이의 고유함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면 엄마의 본능은 더 생기 있게 살아 움직여서 결국엔 엄마이자 한 인간인 '내'가 모자람 없이 온전하게 앞으로의 시간을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음악 앨범은 마지막 트랙의 노랫말처럼 '틀려도 괜찮아. 인생의 한두 마디뿐인걸'이라며, 순식간에 지나갈 아이와 함께한 완벽한 시간은 나와 아이에게 새겨져 모두를 지킬 것이라고 마음 깊이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존중받을 수 있는 문화와 구조, 고유한 존재라는 확신, 향상성을 전제로 한 성찰, 나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들'과 같은 진지한 메시지를 많이 담고 있던 아이브 매거진은 개인, 나아가 모두의 미래를 존중하겠다는 포부를 전해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단어라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가다 보면 잊고 지내기 아주 쉽다. 심해지면 저 단어들의 뜻이 뭐였나 고민하다 잃어버린 샘치고 관심 밖에 둘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많이 아픈데 대체 어디가 아픈지 나도 모르겠다 싶은 때가 도래하면 (좋은 기회이니!) 이 단어들을 찾으러 발버둥 쳐야 한다. 그럼 어떻게든 몸과 마음이 조금은 회복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차도가 보이기 시작한다면 이 아름다운 결을 가진 단어들을 자주 눈으로 마주치고 때로는 소리 내어 읊어도 보자. 이들을 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읽고 보고 듣고 말해보면서 우선은 친해지려는 작은 노력을 해보면 어떻까. 나는 뜻밖의 행운으로 친해지게 되었고 그러다 더 눈에 띄고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잘해줄 수 있을까? 나에게 잘해줄 수 있을까?


언제나 자신을 향해있는 이 단어들의 따스한 온기를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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