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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Jun 25. 2024

흠있는 여자의 여우짓

내겐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친구의 목소리엔 분노가 가득했다. 오빠가 애 달린 이혼녀를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한단다. 

“그 여우가 사람을 어떻게 홀려놨는지......”

친구는 평소답지 않게, 상투적이면서도 상스러운 말투로 그 여자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이는 친구 혼자만의 분노가 아니라, 그 상황에 직면한 그 가족 모두 일치단결하여 내는 분노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녀도 보통 사람들처럼 꿈이 있고, 사랑하는 아들이 있고, 나름의 가치관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일 텐데, 이 상황엔 그저 애 달린 이혼녀일 뿐, 친구의 가족에겐 다른 건 하나도 보이지 않는가 보다. 

그녀는 이미 오빠의 아이를 임신 중이고, 둘은 절대 헤어질 생각이 없더란다. 

세 살 난 그녀의 아들은 이미 친구의 오빠를 아빠로 알고 있다고. 

“결혼하면 아예 아이 성까지 오빠 성으로 바꿀 생각인가 봐.”

친구의 가족들이 생각하는 그녀의 여우짓이 같은 처지인 내가 보기엔 자신의 결혼 이력을 아예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으로 읽혔다. 그녀의 이전 결혼 생활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한 것이었나 보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결혼했고, 시간이 지나 예쁜 아이도 태어났다고 들었다. 

아직도 불만이냐고 친구에게 물었더니, 올케가 워낙 오빠에게도 다른 가족들에게도 잘한다면서 이젠 오빠가 밑지는 결혼이라는 분노는 어느 정도 사그라지 듯 보였다.      

그즈음 전체 혼인 중, 재혼남과 초혼녀의 혼인보다 재혼녀와 초혼남의 혼인율이 높아졌다고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뉴스에서 떠들어댔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인터뷰까지 하는데, 인터뷰에 응한 미혼 남자는 상대가 재혼녀라도 결혼할 의향이 있다면서,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 같았으나, 그런 경우 상대 여자는 자신의 핸디캡 때문에 남자에게 더 잘할 것이라는 기대도 가지고 있다고, 그런 셈속까지 솔직하게 보여줬다. 이제 결혼이 서민들에게도 비즈니스인 건가. 헛웃음이 나온다.    


  



다음 해에 그 친구가 결혼을 했다. 결혼식장에 한복을 입고 있는 여자들이 꽤 많았음에도 나는 친구의 올케가 된 여자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복 차림에 어린아이를 안고 가장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이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애쓰는 여자. 

콤플렉스는 감추려 하면 할수록 더 잘 드러나는 법이다. 두 번째 결혼이 무슨 죄라고,

행동은 21세기에 걸맞게 했으면서 의식 바닥에는 한 번 시집갔으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조선시대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큰아이는 어디에 있냐고 물었더니, 이런 가족 행사엔 데려오지 않는다고, 명절에도 본가엔 데려오진 않는다고 했다. 그 아이에게 새아빠의 가족은 가족이 아닌 셈이다. 괜히 내 아이와 그 아이를 떠올리며 씁쓸해진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친구는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너도 어서 새 출발해. 우리 올케 같은 여자도 하는데, 네가 못할 건 뭐니?”

“너 같은 시누이 만날까 봐 무서워서 못 하겠다.”

농담처럼 받아쳤지만, 친구의 말이 위로라기보단 자신의 올케와 나를 이혼녀라는 이유로 세트로 묶어, 흠 있는 여자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그즈음 나에게도 그런 남자가 있었다. 대학 졸업반 시절 알고 지내던 남자는 내가 이혼했다는 것을 알자 내 주변을 기웃거리더니, 자신이 마치 엄청난 시련을 극복해야 하는 세기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굴기도 하고, 가끔씩은 뉴스에서 본 남자처럼 어설픈 셈속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가족들이 당연히 반대하겠지만, 잘 참아 달라고 한다. 

내가 결혼과 출산, 이혼이라는 엄청난 삶의 이력을 만들며 내공을 키우는 동안, 상대 남자는 이렇다 할 이력을 만들지 못하고 살아왔으면서 말이다.      

나의 삶의 이력이 결혼 시장에서는 흠이 되는 것이다. 

내 아이 천덕꾸러기 만들며, 나를 낮춰가며 결혼을 또? 굳이 그러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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