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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Jul 22. 2024

남편은 늘 해외 출장 중

통장의 잔고는 바닥을 보이는데, 드라마가 편성된다는 소식은 요원하다.

올해 안에 된다고만 장담해 준다면 어떻게든 버텨보겠는데, 내 고민 따윈 관심 없다.

그들도 그들대로 애가 탔겠지.



백도 절도 없는 가난한 싱글맘이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부터가 오산이었다.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나 논술학원이나 해볼까.


교회 친구에게 푸념하듯 한마디 건넸는데,

다음 날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논술 학원 원장이 갑자기 타지로 이사가게 되어 인수자를 찾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친구와 함께 그곳에 가 보았다.

작은 규모에 초, 중, 고등학생이 다 있었다.

이걸 맡을 수 있는 이는 춘천에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기존 원장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300만 원에 시설과 학생을 모두 넘기겠다고 했다.  2년 간 공들여 만들어 놓은 것에 비하면, 너무 헐값이다.

기존 원장도 국문과 출신답게 셈에는 약했다.  돈욕심이 없다고 해야 하나, 인정이 많다고 해야 하나.

아니다. 정말 맡을 이가 나밖에 없다면 적절한 셈이기도 하다.



일 년은 무척 고생스러웠다.

고등학생 수업은 밤 11시에 끝나는 날도 있었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아이는 엄마를 기다리느라 눈이 빠진다.

아이는 혼자 씻을 줄 알았지만, 내가 집에 들어올 때까지 티브이를 보다가 내가 들어와야만 씻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집에서 샤워를 하기가 무섭다는 것이다.

아이도 나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행복은커녕 겨우겨우 살아내야 하는 인생.

딱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몸은 너무 피곤한데,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새벽녘에야 잠이 들어 아이를 지각하게 하는 일도 종종 생겼다.

아파트 15층에 살고 있었다.

안개가 유독 짙은 춘천.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아래가 보이지 않는 날도 많았다.

나도 모르게 뛰어내릴까 봐 무서웠다.

정신과를 찾아가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을 겨우겨우 버티고 나니,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 간판 없이도 학생 모집은 수월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2층 큰 평수로 이사를 하며,

학원과 집을 합쳤다.

그렇게 하니, 아이가 혼자 있을 일도,

내가 뛰어내릴 걱정도 사라지긴 했다.

내가 수업을 하는 동안, 아이는 거실에서 책을 읽으며 엄마의 수업을 엿들었다.

엄마에게 말을 시키면 안 되지만,

벽너머에서 바로 엄마 목소리가 들리니,

아이는 평온을 찾아가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엄마, 이 책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


내 수업 내용과 자신이 읽는 책을 접목시키며 이런 기특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어이구, 우리 서당개.


하며 엉덩이를 두드려 주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 찾아오는 학부모와 학생에게 내 사생활이 뻔히 노출되는 것이었다. 여태까지는 이혼이 뭐 흠인가 하며,

당당히 사실을 털어놓곤 했는데,

나를 찾아오는 학부모들은 중산층에다가 삶의 별 고민 없이 자녀 교육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이었고, 삶의 별다른 고민이 없어서 그런지, 사소한 아이들 간의 갈등도 크게 부풀려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 이혼했어요.'라고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집 어딜 봐도 남편의 흔적은 없었으니, 늘  '남편은 해외 출장 중'이라는 뻔한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혼자 알 수 없는 열등감에 점점 매몰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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