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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KKI May 14. 2021

풋토마토 튀김을 만드는 법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가 남긴 것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Fried Green Tomatoes (1992)

존 애브넛 감독


지난 어버이날 할머니와 함께 식사를 했다. 평소와 같았다면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친척들이 다 같이 모여 북적북적했을 테지만, 올해는 놀랍지도 않은 이유로 네 사람이 단란하게 보내게 되었다. 좋은 점도 있다. 가족들이 많이 모이면 다 같이 한 얘기를 하기 어려워진다. 우리 친가에는 다들 목소리도 크고 말하는 것도 좋아하는 큼직한 삼촌들이 여럿 있는데, 다 같이 모이면 그들을 필두로 모든 이야기가 돌아간다. 정치, 경제, 사회 이야기가 충분히 오고 가면 가끔 과거 시골 살던 추억 얘기를 했다. 그 추억에 나는 없지만 이미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소 밥 먹이러 간 얘기, 먼 거리를 걸어 등하교한 얘기, 이런저런 사고로 죽을뻔한 얘기. 나보다 어렸던 아빠나 작은 아빠, 고모를 상상하면 조금 웃기고 어색하다.


여하튼 올해는 그런 뻔한 이야기들은 낄 자리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멀리 떨어져 앉았을 나와 할머니가 마주 보고 앉은 순간부터 우리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할머니 집 근처 시장이 재개발로 아파트 단지로 바뀌면서 할머니는 대형 마트나, 더 먼 시장으로 장을 보러 다녀야 했는데 그 길을 걸으며 할머니는 ‘내 청춘도 다 갔구나~’ 싶었다고 했다. 솔직히 나는 80이 넘은 할머니 입에서 청춘이 나온 순간이 놀라웠다. 나는 청춘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할머니가 말하는 청춘은 별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근사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갑자기 할머니에게 궁금한 게 많아졌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어땠는지. 할머니의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버이날의 주인공이었던 할머니는 한순간에 어버이가 아닌 자식의 얼굴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할머니의 엄마가 손주를 살리려고 홀로 배를 타고 뭍으로 나간 이야기. 손이 야무져서 어떤 일이고 다 잘 해냈다는 이야기. 밥을 다 먹고 일어나기 직전에 ‘할머니도 엄마 생각하면서 울어요?’하고 물었다. 할머니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사람은 다~똑같아. 집에 혼자 앉아 있으면 가끔 생각하면서 울제~요즘은 더 많이 생각나. 언제 이렇게 늙어버렸나 싶어서.’ 자신은 모기도 물지 않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늙으면 다 그렇다고 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할머니 주민번호도 외우는데, 할머니를 처음 만난 기분이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보면서 할머니 생각을 많이 했다. 나의 할머니 이영자와 이영자의 엄마 이금대. 나와 이금대 씨는 서로 만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이금대 씨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의 삶의 한 장면들은 영화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이금대 씨 이야기를 하며 어느 때보다 열심히 기억을 더듬던 이영자 씨의 표정이 또렷하다. 나는 영화 속 에블린처럼 이금대 씨의 이야기 속에서 이상할 만큼 건강하고 반짝이는 힘을 얻는 기분이었다. 내 삶 내내 알고 지냈던 이영자 씨가 새삼 새로 사귄 친구처럼 느껴진다.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품은 친구를 만난 적이 없다. 이영자 씨에게 내 청춘이 끝나버린 것 같다고 말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사람에게 그 어디서도 받을 수 없는 처방전을 받는 이야기다. 어느 시대나 피할 수 없는 풍파는 진실된 이야기로, 이왕이면 사랑이 가득했던 공간에 대한 이야기로 이겨낼 수 있다. 지금, 오늘, 이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면 그것은 시간을 통과하며 처방과도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잇지와 루스의 삶만큼 그것을 기억하고 전달해주는 니니의 존재가 소중한 이유다. 휘슬 스톱 카페의 풋토마토 튀김이 로즈 테라스 요양원까지 도달했을 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연대를 느낄 수 있었다. 잇지의 토완다는 에블린의 토완다가 되어 또다시 스스로 삶을 구해낸다.


인종과 젠더에 관계없이 누구나 맛있는 바비큐를 먹을 수 있었던 휘슬 스톱 카페를 꾸려나갈 꿈을 꾸는 동시에  초콜릿을 나눠 먹을 로드 테라스 요양원 휴게실 소파가 간절해지는 영화다. 이렇게 따뜻한 영화를 보고 나면 어릴 때 동화책에 마침표처럼 쓰인 문장을 덧붙이고 싶어 진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 의문 하나 남기지 않는 문장의 가호 아래 그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영자 씨와 나의 이야기도 오래오래 함께하길. 할머니가 해주신 달달한 콩조림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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