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멜론 우먼>이 남긴 것들
셰릴 더니 감독
문득 삶의 방향이 흐릿할 때 우리는 이따금 롤모델 삼을 만한 인물을 찾는다. 나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먼저 걸은 사람의 발자취를 쫓다 보면 길 위의 안개가 조금씩 걷힌다. 하지만 매번 좋은 롤모델을 찾는 데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기록은 늘 취사선택의 결과이고, 어떤 이의 삶은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채 아지랑이만 겨우 남기기 때문이다. 특히 기록에서조차 배제된 소수자의 삶은 충분히 따라 걸을만한 길임에도 지도에서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어떤 이는 단순히 지도에 없는 길을 걷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도 위에 자신의 길을 그려낸다. <워터멜론 우먼>에는 시종일관 지치지 않는 유쾌함으로 지워진 길을 찾아내고, 또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건강한 인물이 등장한다. 부실한 지도는 그런 식으로 현실과 가까워진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동명의 주인공인 셰릴은 영화 초반 백인 남녀 커플의 결혼식에서 비디오 그래퍼 일을 한다. 그러더니 문득 선언한다. 그동안 아무도 그려내지 않은 흑인 여성 배우의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레즈비언, 흑인, 여성, 영화감독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결혼식장에서 이뤄진 선언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그 선언은 자신의 세계로 뛰어들겠다는 원대한 포부다. 30년대 영화계에서 하녀 역할밖에 할 수 없었던 흑인 여성 배우 ‘워터멜론 우먼’을 추적하는 것은 지워진 인물의 의미 있는 기록을 찾아내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워터멜론 우먼>은 워터멜론 우먼, 즉 페이 리처즈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와 셰릴의 이야기를 담은 극 영화를 오간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삶은 데칼코마니처럼 포개어진다. 흑인, 여성, 영화, 레즈비언, 백인 연인. 셰릴은 지워진 페이 리처즈의 삶을 기록해내는 일로 자신의 길을 뚜렷하게 그려낸다. 자신의 직업 앞에 머뭇거리던 셰릴은 영화 마지막 떳떳하게 자기 자신을 필름 메이커라고 소개한다. 그의 길이 선명하게 빛난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겠다며 시작한 영화는 스스로를 필름 메이커라고 명명한 예술가의 명언(?)과 함께 막을 내린다.
“Sometimes you have to create your own history.
The Watermelon Woman is fiction.”
Cheryl Dunye 1996
이 크레디트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끝까지 유쾌함을 잃지 않는 이 영화는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 앞에 당당하다. 허구는 종종 사실보다 더 큰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워터멜론 우먼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 가상의 인물 뒤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진실된 존재가 서 있을 것이 분명하다. 기록의 역사가 그들을 지운다고 하더라도 그 진실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셰릴이 만들어낸 자기 자신의 역사는 그것이 허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더라도 충분히 주목할만하다. 1996년 장난스럽게 적어둔 셰릴이 쓴 셰릴의 문장은 2021년 현재 진짜 명언이 되어 있다. 지워진 기록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사람으로 인해 세상은 넓어지기 마련이다. <워터멜론 우먼>은 최초의 흑인 여성 감독 장편 영화다. 이 영화는 안과 밖으로 참 깊다. 이 영화 앞과 뒤로 서 있는 사람이 가득하다. 아 그리고 우선 재밌다. 큭큭 웃다 보면 한 영화감독의 탄생을, 기록되어야 마땅한 역사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제 22회 전주 국제 영화제 선정작입니다.
현재 온라인 상영 중으로 <wavve>에서 시청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