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충분히 노력 중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정말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다시 자문해 봐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불교의 평정심이라는 교리에 따르면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행복에 이르는 핵심이라고 하던데, 도대체 세속으로 가득 찬 이 인간 세상에서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이미 사람들의 온몸, 뼛속까지 파고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가능한가? 선사시대처럼 내 필요한 걸 이웃의 친절을 통해 제공받고, 또 그들이 필요한 건 내가 선뜻 내어주는 물물교환의 방식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돈에 얹어둔 마음을 버리라니. 무작정 절에 찾아가 지나가는 아무 스님이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다. 스님들도 신자들이 바치는 물질적 불공으로 살고들 있으니, 신자들이 공양을 그득그득 해 준다면 매우 고마워하실 거 아니냐고.
흔히들 얘기한다. 과거는 지나가 버렸으니 후회해 봐야 소용없고, 미래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 걱정하는 건, 현재를 낭비하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을 충실히 살라고 말이다. 그래, 다 좋지만, 통장에 터럭 거친 징그러운 쥐가 한 마리 들어앉아 계좌잔고를 매일같이 먹어치운다고 해 보자. 그 광경을 보면서 ‘아, 통장이 작살나고 있는 중이구나.’ 그렇게 평정심을 유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냔 말이다. 그건 해탈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백치가 아닐런지? 현재에 집중하라고 해서 생활비에 쪼들리는 사람이 ‘아 지금 이 순간 난 궁핍하구나.’ 이 감정에 집중한다고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게 순리가 아닌가 말이다.
난 아직 불교의 ‘불’자도 모르는지라, 이런 이슈를 논의하려는 시도가 섣부를 수 있다. 이 불가사의한 가르침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하고자 불교에서 전하는 교리를 그래서 공부해 보기로 했다. 책모임에서 어떤 이가 추천했던 법륜스님의 ‘반야심경’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중이다. 읽기 어렵지 않다고도 하고, 세상사는 진리를 알려주는 데다, 행복에 한 발짝 가까이 갈 수 있는 책이라니, 이보다 더 좋은 자기계발서가 있을까. 궁금해 죽겠다. 책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지만 살면서 내가 ‘반야심경’이라는 책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는 현대의 낭만적 소비지상주의에 대해서 논하는 부분이 잠깐 있다. 실제보다 열 배는 거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본주라는 시스템이 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이 시스템을 원활하게 굴려야 하는 지배 세력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이들에게 더 많이, 더 자주 소비하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근대 이전에는 재화가 한정되어 있다는 인식이 강했던 터라, 사치하는 행동에 인류는 죄의식을 느껴야 했다. 사치로 부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은 아주 일부의 사람들, 왕가와 귀족뿐이었지만 이들이 재산을 더 많이 가질수록 누군가는 그만큼을 뺏겨 굶주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은 그 당시 이런 논리에서 생겨났던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판도가 바뀌었다. ‘신용거래’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자원을 실제의 재화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불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통용되는 돈의 90%는 ‘신용’이라는 명분하에 거래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품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지금 당장 은행에 통장잔고에 찍힌 자신의 재산을 찾으러 간다면 은행은 내어 줄 돈이 없으므로 파산할 것이다.) 이 허구의 돈으로도 전 세계가 멀쩡하게 돌아가도록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는, 이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다니는 라이프 스타일이 오히려 만인의 로망이 되었다. 사람들은 좋은 집, 좋은 차, 비싼 가방과 럭셔리한 휴양지로의 여행을 갈망한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부’에 대한 열망이 어찌나 뜨거운지, 특히 한국은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독려하는(실은 샤우팅에 가까운) ’자기계발서가 항상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진 적이 없다.
그러나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본주의 속 함정’은 그럴수록 우리는 더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현재 내게 없는 걸 쫓아갈수록 ‘부자가 될 미래’에 치여 현재를 희생하거나 망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반문이 들 것이다. ‘어쨌든 현재를 다 희생하여 부유해지면 그 순간부터는 행복할 거 아니야?’ 나 또한 갖고 있는 이 생각에 대해, 다는 이해할 수 없지만, 불교의 행복론은 대략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어필하는 듯하다.
‘부유해진 그들은 그들 시점에서 또 다른 미래를 계속 내다본다.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거나 재투자를 하기 위해 끊임없이 돈을 굴려 규모를 키워야 하고, 그 방법에 대한 고민과 분투는 예전보다 더 심해질 것이다. 부를 동경하고 유지하고자 하면 할수록, 죽을 때까지 우리는 현재를 온전히 살 수 없게 된다. 부유한 자는 그들 나름대로 불행하다.’
대충 머리로는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나도 돈을 생각하지 않은 채로, 집착은 더더욱 하지 않고 살고 싶은 건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느냐는 얘기이다. 돈은 현대의 필수품이자 거의 우리의 전부가 되어 있지 않은가.
불교의 세계에 입문하고 깨달음을 좀 더 얻었을 때, 다시 얘기해 보기로. 어쨌든 ‘개인의 행복’에 집중하는 불교는 매력 있는 종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