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 글에는 결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풀밭 위의 점심>과 함께 <올랭피아>를 그린 마네가 이 두 작품으로 당시 세간의 극심한 비난을 샀던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특히 ‘올랭피아’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구도와 포즈를 그대로 차용하여 패러디했는데, 당시 티치아노의 그림이 극찬을 받았던 반면 마네의 ‘올랭피아’는 온갖 비난과 모욕, 폄하를 감내해야 했다.
한국에서 ‘더러운 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패러디가 된 올랭피아는 당시 ‘창녀’의 대명사가 되었고 마네의 그림은 더러운 작품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그러나 당시의 케케묵은 관습적 평가였을 뿐 올랭피아는 후대에 인상파를 일으킨 명작으로 재평가 받는다. 한국의 한 화가가 이 그림을 또 다시 창녀에 빗대어 패러디 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무지이자 실수이다.)
‘올랭피아’는 구도와 포즈만 차용했을 뿐 여러 가지 면에서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건 누가 봐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마네가 비난을 받았던 건 화풍의 차이나 작품성의 차이 때문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가 그토록 비난을 받았던 원인은 바로 그림 속 모델의 도발적이라고 할 정도의 당당한 시선과 태도 때문이었다. 마치 그림 속 모델 또한 관객을 관찰하고 있는 듯 똑바로 응시하는 시선, 그것이 관객에게 주는 왠지 모를 불편함 때문이었다.
마치 자신을 보는 눈 따윈 하등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올랭피아의 시선은 당시 관습적으로 온당(?) 하다고 생각했던 모델의 태도는 아니었다. 이는 티치아노의 그림 속 여인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신화 속 여신과도 같은 고전미를 갖추고 있는 여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눈을 부끄러운 듯 의식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여인의 얼굴에는 관객을 유혹하듯 미묘한 에로틱함이 같이 드러나 있다. 여인의 나신이 주는 부드러운 육감 미와 순종적이면서 동시에 상대를 유혹하는 듯한 표정에서 느낄 수 있는 은근한 에로티시즘은 그림을 감상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당시 여성은 예술에서조차 주체성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객체’였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초반에서 엘로이즈가 마리안느가 그린 자신의 첫 초상화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심술궂기만 하고 별다른 특징 없이 보였던 엘로이즈가 그 순간부터 다르게 보였다. 그 순간부터 이 영화가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했다.
18세기, 프랑스의 어느 귀족 집안, 백작부인은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초상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가를 고용한다. 아무리 정략결혼으로 맺어지는 귀족집안이라 할지라도 예비신부의 초상화는 예비 신랑측이 최종결정을 내리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신부의 초상화가 신랑에게 컨펌(?)이 되어야만 결혼이 최종 성사될 수 있다. 초상화 화가로 고용된 마리안느에게 백작부인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내가 시집오기 전에 이 초상화가 먼저 여기 와 있더군요.”
거실 벽에 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여주며 아름답고 훌륭한 그 초상화 덕분에 좋은 집안으로 시집올 수 있었다 얘기하는 이 장면은 진지한 부인의 태도만큼이나 나에게 희극적으로 다가왔다.
‘시집가기용 초상화’라는 중차대한 미션 앞에서 딸은 자신을 그리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화가들에게 쉽게 포즈를 취해주지 않는다. (미션 임파서블?) 포즈는 커녕 자신의 얼굴조차 보여주려 하지 않는 딸 엘로이즈에게 급기야는 백작부인이 속임수를 써서 딸의 초상화를 만들 방법을 강구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산책친구라고 속이고 고용한 화가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의 얼굴을 관찰하고 외워 그리라고 주문했던 것.
대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은 대상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을 필요로 한다. 엘로이즈를 그린 마리안느의 첫 번째 초상화가 관습적 이념과 남성적 시선을 따른 전형적이고 (엘로이즈의 평에 따르면) 생기 없는 작품이었을지언정, 엘로이즈는 산책 중 자신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관찰해 주는 마리안느에게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풀기 시작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 개성을 그대로 화폭에 담으려 했던 두 번째 작품부터 대상을 그리는 화가뿐만 아니라 대상이 된 엘로이즈까지 변화하기 시작한다는 점이 영화에 잔잔한 감동과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외딴 섬의 외로운 저택이라는 배경은 어느새 두 사람의 사랑과 온기, 작품을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의 에너지로 가득 찬 공간이 된다. 비록 여인 둘의 사랑이 마지막에 비극을 맞으리라는 걸 서로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서는 모델이자 시선의 대상이 된 엘로이즈가 자신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화가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켜 주던 장면이 인상 깊었다. 서로 눈을 맞추고 서로를 관찰하면서 화가와 모델이 함께 완성해 가는 두 번째 초상화는 한쪽의 일방적이고 관습적인 시선으로 그린 첫 번째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건 두말할 여지가 없다. 엘로이즈의 초상화는 엘로이즈와 함께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그 상징으로써의 불꽃은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에서 활활 타오른다. 마리안느에게는 훗날 또 다른 그림의 영감으로도 작용했던 그 불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닌 엘로이즈가 얻은 생명의 상징이었다. 그 씬이 너무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제한적인 운명 앞에서도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만들 수 있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와 함께하는 인생을 선택했다면 고통은 당장에야 따르지 않았겠으나 그 선택이 두 사람의 미래에 가져올 거대한 불행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를 잘 알았던 엘로이즈는 자신의 초상화를 보내기로 결정한 정혼자를 선택함으로써 오르페우스의 신화 속 에우리디케가 된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로 인해 결정된 운명이 아닌, 비극적 운명일지언정, 스스로 지옥의 길을 선택한 에우리디케로 남았다는 점이 인상 깊다. 도망치듯 떠나는 마리안느에게 뒤돌아보라고 했던 엘로이즈의 모습에 마음이 미어졌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했던 신화 속 오르페우스는 결국 걱정되었던 아내를 순간 돌아보게 되어 영영 그녀를 잃었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그렇게 자신을 잃게 만들었다. 그 장면에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그녀가 입었던 웨딩드레스는 마치 드레스가 아닌 죽은 사람이 입는 소복처럼 연출되었다. 영화 속 모든 상징과 비유가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아름답다. 사람은 단 며칠, 단 한 순간의 기억과 추억만을 안고도 평생을 살아낼 수 있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건 불운을 초월하는 축복이라는 생각을 새삼 해 본다.
2019년 칸에서 기생충과 경쟁했던 영화라던데, 아, 난 솔직히 이 영화가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