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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넘어서는 우울 그리고 예술

영화 '디 아워스'

by 이라IRA

(이 글에는 결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23년, 1951년, 2001년을 살고 있는 세 명의 여인, 서로를 만난 적 없는 인물들은 이들의 삶이 그 무언가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내용이 지독히도 우울하다는 지인의 얘기를 들었으나 ‘우울’이 영화에서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로 다뤄진다는 점과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된 독립된 세 개의 이야기가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진다는 설정이 매력적으로 다가와 보게 된 작품이다. 현대인 중에 우울증 한번 안 겪고 살아 본 사람이 있을까? 예상대로 영화는 무거운 주제와 내용에도 불구하고 자주 우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인 나에게 묘하게도 위로가 되어 주었다.

사진출처 네이버TV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을 읽어보려고 노력했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 시도했던 소설 ‘등대로’는 반도 못 읽은 채로 덮어버렸고 울프의 대표적인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비교적 덜 어렵게 읽혀 어쨌든 완독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의식의 흐름을 통해 표현했다고 하는 그의 심오한 모더니즘과 글의 전개방식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 울프의 다른 작품들을 읽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울프의 글은 너무나 어렵다!) 다만 그의 작품들, 특히 ‘자기만의 방’에서 보였던 선구적이고 진보적인 페미니즘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자신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조건으로 경제력과 자기만의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공감한다. 여자가 결혼과 동시에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택할 때에 매우 신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침부터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는 버지니아, 그를 방해하는 하녀의 노크 소리와 하녀를 쏘아보는 니콜키드먼 (버지니아 울프역)의 눈빛만큼이나 영화 속 모든 장면과 대사들은 강렬하다.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이라는 세 명의 전설적인 연기 거장이 펼치는 연기력 때문에도 그렇지만 영화 속 디테일들이 너무나 섬세하고 인상적이었던 ‘디 아워스’는 세 명의 각기 다른 삶과 시대를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조명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산만하거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게 불가능 했다는 점이 낯설고 섭섭했을 뿐.

사진출처 네이버TV


세 여인을 묶어주는 대표적인 연결고리는 ‘우울증’, ‘양성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이 있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처럼 겉으로는 모든 것을 가진 듯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인데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점점 죽어가는,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과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인 사투를 벌인다는 점이 세 여인에게서 관찰되는 공통점이다. 다만 ‘사투’인데도 어쩜 이렇게 우아하고 예술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 고요하고 백조 같은 사투라고 해야 할까. 내가 느꼈던 바로는 그랬다. 속으로는 생사를 가르는 치열한 전투였을지언정 영화의 분위기와 배우들이 뿜는 아우라 때문에 그 사투마저도 매우 아름답게 느껴지는 착시 현상 말이다.



우울증은 자신을 옥죄고 있는 주위 환경 때문에 후천적으로 생길 수도 있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원인 모를 그 사람의 성향이기도 하다. 개인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압도적인 우울은 타인이 도와 줄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큰 해일과 같은 것이다. 지인 중 누군가가 그랬다. 영화 속 버지니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넉넉한 재산을 갖고 있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헌신하는 남편까지 둔 그가 불행한 이유를 공감도, 이해도 할 수 없다고, 그 친구는 그렇게 분노(?)했다.

그럴만도 하지, 그 친구를 이해할 만도 하지만 나만이 알 수 있는 내면의 우울증은 타인이 공감할 수 없는 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이다.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도 도와줄 수도 없는 것, 잘못하다 상대방에게 더욱 치명적인 고통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마지막 씬에서 나오는 대사는 그래서 가장 지혜롭고 울림을 주는 명대사로 각인되어 있다.

‘사람은 완벽한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처한 곤경을 섣부르게 도와주려는 노력이 오히려 그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상대방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다.’

기차역에서 공황장애 증세를 보이며 오락가락하는 버지니아를 마주하는 남편 레나드가 터지려는 울음을 삼키며 고통스러워하던 장면이 몇 년이 지나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레나드의 표정 안에 드러났던 절망과 좌절이 충격적일 정도로 강하게 다가왔다. 그 씬에서 만큼은 버지니아가 아닌 레나드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걸 그만 둘 수 없는 남편, 그런 남편을 둔 버지니아가 세상 복 받은 여자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으로 인해 그는 더욱 불행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표현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진출처 네이버TV


촉망받는 작가에게도 ‘집안 살림’이라는 짐은 울프를 압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주인으로서 살림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고 불만을 늘어놓는 하녀와 버지니아가 신경전을 벌이는 씬이 흥미로웠다. 하녀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불만을 토로하는 하녀에게 버지니아 울프가 은근슬쩍 심술을 부리며 골탕을 먹이는 장면이 꽤나 재미있었다. 울프와 하녀들 간의 팽팽하고 긴장감 넘치는 공기를 달걀 깨는 소리(?)와 배우들의 연기력만으로 완벽히 소화했다. (영화를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금지된 사랑’ 이야기를 해 볼까?

동성애와 양성애라는 한국사회에서는 아직까지 몹시도 금기시 되는 사랑 말이다. 종족번식에 필수적인 ‘이성애’가 보편적인 자연현상이라는 점에서 동성애는 정말 치명적인 돌연변이일까? 이들이 정말 어쩌다 신이 범한 ‘오류’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지 내게는 미스테리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대로 그렇게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차별받지는 않아야 하고 범죄가 아닌 이상 인류의 다양성은 존중 받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동성애를 결코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50년대와 20년대의 영화 속 로라와 버지니아, 이들이 불행했던 이유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특히 로라는 여성으로서 당시 사회가 지향했던 이상적인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부유하고 안락한 가정, 든든한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 몇 달 후 태어날 뱃속의 딸까지. 그러나 로라는 영화 속 세 주인공 중에서 가장 불행한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사진출처 네이버TV

‘평양 감사도 제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우리 속담도 있듯 그는 남편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고 평화롭고 안락했던 루틴에 숨이 막혀 했다. 키티라는 자신의 동성 친구를 남 몰래 미친 듯 사랑했고 키티로부터 자신이 자궁암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지 모른다는 암시의 말을 전해 듣고는 삶의 의욕을 상실해 버리고 마는 로라, 그들은 서로의 강렬한 사랑을 서로에게 조차 표현할 수 없었다. 로라가 키티에게 키스한 후 불쾌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한 대목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키티의 과장되게 밝은 표정은 그들의 인생 한 복판을 지배하고 있는 거짓으로 위장된 행복과 그 안에 내재된 끔찍한 불행을 잘 보여준다. 영화 내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연약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줄리안 무어의 연기가 일품이었다. 와, 줄리안 무어, 신들렸다.

사진출처 네이버TV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 된, 그만두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사랑을 해 본 경험이 있는가?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사랑이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급기야는 자신의 인생을 다 집어 삼키려고 해도 그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오히려 그 사랑 앞에서만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낀다고 얘기하는 영화 속 클라리사(메릴 스트립 배역)는 어찌 보면 버지니아와 로라보다 더 위태로운 상황처럼 보였다. 클라리사를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부르며 정신적으로 학대 아닌 학대를 일삼았던 리처드가 후반에 이르러서 영화속 로라와 긴밀한 관계에 놓인 인물임이 밝혀지는 반전은 등골이 오싹해지게 만들었다.

사진 출처 네이버TV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연결고리는 영화 속 세 개의 독립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를 단 하나의 사건처럼 긴밀하게 묶어버린다. 버지니아 울프가 쓴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이 로라에게 영향을 주어 로라의 인생에 큰 변곡점을 만들어 냈고 이것이 또 다른 시대, 또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도 영향을 주는, 그야말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명언이 맞아 떨어지는 스토리였다.

이들이 불행을 극복하는 방식은 각기 달랐다. 비록 ‘행복’이라는 (판타지와도 같은, 나는 행복이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궤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모두 각자의 노력과 발버둥(?)을 통해 짊어진 불행에서 해방된다는 결말을 볼 수 있게 된다. 울프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는 죄책감과 스스로의 불행에서 해방 될 수 있었고 로라는 거짓으로 채운 삶의 공간을 스스로 과감하게 박차고 나옴으로써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클라리사는 자신을 댈러웨이 부인의 창살 안으로 가둬버린, 지긋지긋하면서도 치명적인(?) 그의 연인이 울프처럼 자살을 택한 덕분에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섣부르게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무수한 사연과 인생, 그 안에 담겨진 인간의 깊은 고뇌와 고통을 어찌 타인의 입장에서 단정 지어 버릴 수 있을까. 영화 ‘디 아워스’는 보고 나면 머리와 마음이 다 같이 무거워 지기는 하지만 인생의 숨겨진 이면과 진실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고 또 거기서 깊은 울림을 얻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완전 추천.




P.S

영화 속 시대 패션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20년대의 플래퍼 룩이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니콜 키드먼의 옷 맵시, 50년대 들어 디올이 파격적인 아워글래스 실루엣을 선보이면서 대 유행을 타게 된 ‘뉴 룩’ 등, 영화 속 패션 변천사와 다양하고 매력적인 의상들을 볼 수 있어서 눈 또한 즐거웠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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