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 토냐'
(이 글에는 결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속의 어떤 기준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단아, 중산층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한 부모 아래의 하층민, 천박한 의상과 헤어스타일의 세계적인 여성 피겨스케이터 토냐 하딩.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져서 더욱 흥미진진하다.
굵직한 세계 피겨 스케이팅 대회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나는 TV 앞에 딱 붙어서 그들을 보느라 정신이 팔렸었던 기억이 있다.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우아한 몸짓과 화려한 기술, 예쁜 의상을 입고 빙판위에서 스케이트 날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춤을 추는 그들은 어린 내 눈엔 마치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요정들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에게도 그 중엔 다른 요정들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던 토냐 하딩이 있었다.
새빨간 색, 형광기도는 연두와 보라, 하늘색의 원색적인 컬러감의 의상들과 히피 펌의 포니테일 헤어스타일은 멀리서도 그녀가 토냐 하딩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게 했던 그녀의 독특한 점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개성은 이혼한 한 부모 아래에서 자라났다는 불운한 배경과 겨울에 모피 한 벌 장만 할 수 없는 가난함으로 인해 심사위원들에게 개성이 아닌 천박함으로 낙인이 찍혔다는 건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당시의 피겨 선수들은 모두 대기실에서 밍크나 폭스와 같은 값비싼 모피코트를 걸치고 있었다고 하고 그래야만 했었다(?)고 한다.)
미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더더군다나 1990년대 초 당시에는 꽤나 보수적인 편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현재의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느껴져서 씁쓸하긴 하지만 말이다.) 미국은 여전히 자녀를 둔 부부 중심의 단란한 중산층 가족을 이상적인 가족형태로 여겼고 이 이상적인 가족의 그늘에서 단정하고 우아하게 자란 여성을 국가와 사회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완벽한 기술과 연기를 펼쳐도 연신 터무니없이 낮은 점수를 주는 심사 위원에게 직접 찾아가 토냐가 따져 묻는 장면으로 인해 알 수 있었던 사실이다. 부당한 점수를 받았다는 그의 항의에 심사위원의 어이없었던 대답은 정말 저렇게 얘기했을까 싶을 정도로 적나라했다.
“당신은 우리가 바라는 여성피겨선수의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아요. 당신은 가족도 없고 당신의 의상은 너무 천박해요.”
이미지? 실력과 점수를 논하는 지점에서 이미지를 언급하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가장 임팩트(?) 있었던 씬이었다. 토냐가 트리플 악셀을 여성 피겨 역사상 최초로 성공시켰던 씬보다도 더 말이다.
충격적일 만큼 힘 빠지는 이 대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없이 몰입할 수 있었던 동력은 영화가 묘사하는 토냐의 직진 근성(?) 때문이었다. 영화 속 토냐가 가진 단순한 열정과 에너지, 잡다한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쿨한 성격은 그의 매력을 더욱 부각시켰고 관객으로 하여금 토냐를 더욱 응원하게 만든다. 자신을 향해 드러내는 세상의 적대감과 불공정한 처우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결국 해 내고 마는 그의 담대함이 돋보였다. 그런 면에 무한 애정이 갔다고 해야 할까.
폭력적이기 이를 데 없는 무시무시한 모친 밑에서 무려 칼까지 맞는 수모를 당하고 엄마를 피해 달아난 남편에게서도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가엾은 한 인생이 마치 토냐의 인생에서는 ‘이런 것 쯤이야.’ 정도로 치부되는 느낌이다. 큰 불행과 불운에도 불구하고 ‘내 갈 길 간다.’는 느낌이랄까. 그것도 명랑하고 아주 씩씩하게. 그런 점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다운시키지 않고 오히려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있다.
마고 로비의 굉장한 연기력도 인상적이다. 전형적인 금발 미녀의 이미지로만 생각했던 그가 이런 연기력을 가진 배우일 줄이야. ‘메리 오브 스콧’에 이어 마고로비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다.
토냐 하딩 얘기를 하자면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라이벌 낸시 캐리건에 대한 테러사건 또한 영화는 풍자와 유머 코드를 섞어 다소 희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나중에서야 토냐가 테러사건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이 사건 이후로 토냐는 단순히 ‘천박한 마녀’ 정도에서 ‘세계적인 악마’ 이미지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조차 토냐는 이 대사 하나로 관객의 걱정과 마음의 짐을 묘하게 덜어주는 마술(?)을 부린다.
“That’s not my fault.“
내 잘못이 아니라,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는 토냐 하딩이 가장 많이 했던 이 말은 그의 인생 가치관과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사이기도 했다. 타고난 불행과 불운, 폭력적인 엄마와 남편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놀랍게도 인생의 모든 역경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나아가 이겨내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난? 오케이, 받고 더블로 가.’ 마치 이런 느낌이랄까. 끔찍하고 무거운 배경을 씩씩하게 안고 가는 토냐를 보면서 오히려 미소를 짓게 만드는 ‘아이 토냐’는 살면서 비단 여성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꼭 한번은 봤으면 하는 영화로 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