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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미친듯 사랑하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by 이라IRA

봉사활동을 다녀온 엄마를 맞으러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세 자매, 내일 파티를 위한 드레스를 두고 티격태격하던 중, 딸들은 귀가한 모친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중재를 요청한다. 엄마는 딸들을 어르고 근심 어려 보이는 스칼렛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시무룩 한 얼굴을 하고 있는 큰 딸을 위로한다. 온 가족이 모여 앉은 저녁시간의 거실, 신에게 기도를 바치며 하루를 마치는 영화 초입의 이 장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초반에서 보여주는 오하라 일가의 모습은 걱정 없이 마냥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학교를 마치고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노을이 질 때까지 뛰어 놀다 집에 돌아오면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엄마와 엄마가 짓고 있는 구수한 밥 냄새, 그 때 느꼈던 안정감과 안락함을 회상하게 한다.

행실 나쁜 하인을 아내의 조용한 조언에 따라 신속하게 해고시키는 가장 오하라, 큰 딸과 함께 타라의 드넓은 대지 앞에서 옷깃을 날리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그의 모습에서도 한 집안의 든든한 가장이자 따뜻한 아버지가 이끄는 훈훈하고 안정적인 가족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1800년대, 흑인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던 미국 남부의 대규모 농업사회와 이 사회구조의 지배층에 있던 백인의 부유한 가정의 모습을 아름답다 못해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렸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거릿 미첼 소설 원작)는 지금으로써는 극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마치 흑인노예제를 옹호하는 듯한 시선이 현 시대의 윤리와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은데다, 인종갈등이 심한 미국인에게는 특히 불편하게 다가왔던 것. 시대가 한참 변해버린 지금 미국 전역에서 상영금지조치까지 내려졌으나 영화 초입 의 유토피아적인 묘사 방식은 독자 혹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메마른 마음속에 훈훈한 온기를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학창시절 처음 접했던 이후 너무 좋아서 영화의 모든 장면과 대사를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여러 번 반복해서 봤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인종 차별 이슈와 함께 전통적인 가족과 성 역할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나에게도 불멸의 명작이자 중독적인 영화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이 작품이 정말 매력적인 점은 다른 데에 있다. 사상과 인성이 바르고 이상적인 캐릭터 대신 모든 사람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던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 그렇다. 소설과 영화가 1900년대 초반, 매우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더욱 신선하고 파격적인 시도이다. 관객은 못되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스칼렛과 신사의 기준과는 걸맞지 않은 이단아 레트에게 오히려 점점 빠져든다. 처음에는 철부지 없고 못된 스칼렛을 나는 그저 ‘얄미운 악동’ 정도의 귀여운 시선으로만 멀찌감치 바라보았다. 그러다 미국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그가 겪는 인생의 전환점과 롤러코스터와도 같은 인생굴곡을 바라보면서 점점 그를 마음으로 응원하게 된다. 급기야는 스칼렛에게 완전히 감정이입을 하게 되어 어느덧 그과 함께 울고 웃는 나를 볼 수 있었다.





현재를 살라는 말이 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자, 또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해 봤자 결과는 현재의 시간을 낭비하고만 있는 꼴일 뿐이다. 스칼렛은 전쟁 통에 양 부모를 모두 잃었고 가난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비극을 맞게 되었으나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사랑했던 애슐리처럼 지옥같은 현실에 시종일관 낙담만 하거나 과거의 향수에만 젖어 있지 않았고 매번 현실을 담대하게 마주하며 정면 돌파하는 쪽을 택했다. 북부 군에 의해 황폐해진 타라의 땅 앞에서 ‘사기, 절도, 심지어 살인’을 통해서라도 다시는 내 가족을 굶게 하지 않겠다는, 신을 향해 도전하듯 던지는 맹세와 결연한 의지는 소름이 끼치도록 멋진 장면이었다. (이후 스칼렛은 정말 사기와 살인을 태연하게 자행한다. 여기에 또 놀랐던 일인.)


문제를 타파하는 수단이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못했으나 현실을 직시하는 그의 태도와 용기, 망설임 없는 결단력, 불도저처럼 행하는 실천력을 보며 영화 내내 나는 감탄을 연발했다. 여리고 고양이 같이 예쁘장하기만 한 외모로 어디서 그런 장군 같은 에너지가 솟아오를 수 있을까. (그러나 소설에서 스칼렛의 외모는 예쁘지 않다고 나온다. 마거릿 미첼은 스칼렛의 개성에 초점을 맞추지만 영화에서는 모든 남자를 홀리는 여신급 미모로 등장한다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비비안 리를 너무 좋아해서 용서가 된다.)

영화 속에서 멜라니, 애슐리 부부와 스칼렛, 레트 부부는 캐릭터 면에서 서로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도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과 정중한 태도, 여러 인간상을 포용할 줄 아는 관용을 갖춘 멜라니, 애슐리 부부는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반면 스칼렛과 레트는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실리주의(나쁘게 얘기하면 돈밖에 모르는 천박함), 겸손을 모르는 거만함 등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에게서 미움과 질투를 받는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찾아온 큰 위기 때마다 실질적으로 이들을 구해줬던 이들은 스칼렛과 레트라는 점이 흥미롭다. 전쟁 속 가난 앞에서 스칼렛은 멜라니를 비롯한 오갈 데 없는 군인들을 먹여 살렸고 대지를 빼앗으려는 북부 측 사람들로부터 타라를 지켜냈다. 애슐리와 남부 쪽 남자들이 사형선고를 받을만한 사고를 쳤을 때 그들을 위기에서 결정적으로 구해 준 사람 또한 레트였다. 애슐리와 멜라니는 바르고 건전(?)한 이상주의자였으나 모두가 역경에 빠졌을 때 스스로조차 구하지 못하는 나약함을 드러내었던 반면, 현실주의자이면서 실리주의자인 스칼렛과 레트는 그들 앞에 닥친 위험과 난관을 그때그때 헤쳐 나가는 기지와 역량을 발휘한다. 특히 스칼렛의 결단력과 단호함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스칼렛이 가진 장점 중 어느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한 나로서는 스칼렛을 한 때 인생의 멘토로까지 생각하고 추종(?)했다지..?

그러나 우리는 내가 가진 것과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곧잘 잊어버린다. 영화에서 스칼렛은 가엾게도 이를 아예 인지조차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끝의 직전까지 애슐리만 바라봤던 스칼렛의 장님 행세가 안타까웠지만 자신의 마음을 직진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스칼렛의 그 모습 역시 지극히 스칼렛 다운 모습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장대한 스케일과 스펙터클한 인생의 굴곡, 비극적이고 전쟁 같은 사랑을 감동적으로 담아낸 역작이다. 딸이 있다면 이 영화를 꼭 보라고 권유했을 것이다. (남녀사이의 치정이 좀 있긴 하지만..) 모든 미사여구와 호평을 떠나서 스칼렛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다 끝나고도 남을 작품. 이하 스칼렛 오하라와 비비안 리 예찬론자였습니다.


P.S

영화를 반복해서 감상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영화에서 나오는 다양하고 현란(?)한 의상 퍼레이드 때문.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풍성한 크리놀린 드레스를 마음껏 볼 수 있고 가장 세련되고 예쁜 드레스만 골라서 입고 나오는 비비안 리의 패션쇼(?)를 즐길 수 있다. 스칼렛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크리놀린에서 버슬스타일로 넘어가는 패션의 변천사 또한 감상할 수 있다. 눈이 어찌나 즐거운지.. 의상만으로도 소장가치는 충분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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