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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사랑, 가족을 왜 다 가질 수 없어?

영화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Mary Queen of Scots)'

by 이라IRA
사진출처 네이버TV

(이 글에는 결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 좋아하는 풍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오랜 기간 두고 두고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여태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던 어떤 인물이나 사건이 감독의 다른 시각으로 판이하게 바뀌어 버릴 때는 더욱 그렇다. 이 영화는 내가 알고 있던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절대군주 엘리자베스 1세와 유약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처참하게 죽었다고 알고 있던 스코틀랜드의 메리스튜어트 여왕의 삶을 한번쯤은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고 생각할 수 있게끔 해 줬던 작품이다.


두 여성은 당대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꾸준히 오르내리는 영원한 라이벌이지만 당연히 더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은 엘리자베스 1세라고 여겨진다. 엘리자베스 여왕때 잉글랜드는 하나의 작은 섬나라에 불과했던 약소국에서 해외와 신대륙으로 영토를 확장시키는 최강의 제국으로 급격하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런 큰 업적을 지닌 인물에게 그런 평가는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반면 메리 스튜어트는 남편의 권력욕심에 휘둘렸고 메리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귀족들로 인해 한결같이 불안한 왕권을 유지했던 왕이다. 결국 남편과 오빠 둘 모두에게 배신당하고 잉글랜드로 쫓겨 도망쳐 왔던 바보같고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다. 게다가 잉글랜드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옥살이 같은 궁 생활을 하다가 결국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처형당하는 불운한 인물, 우리는 대부분 메리 스튜어트를 그렇게 알고 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1세보다 한 수 낮은, 아니, 한참 떨어지는 유약했던 왕으로 평가한다.

중학교땐가, 세계사를 가르쳤던 어떤 교사는 메리 스튜어트를 두고 '처절하게 예뻐서' 팔자가 센 여성이었다고 평했다. 남편을 두고 이탈리아 남자랑 바람 폈다가 벌 받았다나 뭐라나.. (당시엔 재밌게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선생님, 참 별로다.)



그런데 영화는 내가 생각했던 두 인물을 많이 다르게 그리고 있다.

영화 속 메리는 왕의로서의 권력과 권한을 강력히 유지하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추구한다.

자신을 배신하고 왕권을 탈환하려는 이복오빠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전장에서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관대함도 보여준다. 게다가 자신의 아들 이름을 이복오빠의 이름과 같은 제임스라고 지으면서 자신의 혈육과 한층 더 가까워지려는 노력도 보여주지만.. ( 그 이복오빠라는 작자는 나중에 또 동생을 배신하고 왕권 탈환에 성공한다.)


권력이 목적이었던 단리경을 사랑하고 그 의도를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따뜻한 가족의 상을 포기하지 않았던 메리의 노력을 엘리자베스는 질투심과 경외감 섞인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왕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사랑을 택하진 않았지만 (그녀에게도 연인이 있었다.) 영화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가족이라는 작은 울타리와 사랑을 갈구했던 것으로 그리고 있다. 메리가 아들을 출산했을 당시 메리의 붉고 선명한 피의 색깔과 엘리자베스가 완성했던 오브제 아트(?)의 선홍색 꽃이 대비되었던 장면이 인상적이다.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출산 소식을 듣고 그 작품을 다 해체시켜 버리는데 그 장면 또한 기억에 남는다.

엘리자베스가 천연두를 앓는 와중에 자신의 연인을 정신없이 찾던 씬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천연두가 올라와 괴물처럼 되어버린 얼굴을 어루 만지면서 위로했던 그녀의 연인에게 순간 자신의 모든것을 내보이며 무너졌던 엘리자베스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다!)




왕이 남성이라면 탈이 날 일 없겠지만 왕의 자리에 여자가 올랐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몇 가지 변수와 위험요인이 생기기 마련인데 여왕의 부마(남편)가 되는 남성은 왕과 대등한 권한과 권력을 행사하려 드는게 당시의 일반적인 정서였기 때문. 여왕이 결혼을 하면 한 나라에 왕이 두 명이 된다는 얘기이다. 아니, 왕과 부마 역할이 아예 뒤바뀌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처음부터 경계했던 엘리자베스는 아예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

그럼, 왕의 권한과 힘을 온전히 자신에게만 두는데 성공하고 이후로 바다를 장악하여 위대한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엘리자베스는,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감독은 '아니오'라고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메리 스튜어트의 삶을 질투했던 영화 속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관대함과 따뜻한 마음을 지닌 메리를 더 강인한 왕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녀의 삶을 더 풍요롭게 그리고 있다. 영화속 엘리자베스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외로웠다. 그녀는 메리 스튜어트가 가진 인생을 말 없이 동경했고 또 질투했다.


그러나 권력과 사랑을 다 갖고자 했던 메리 스튜어트는 권력 찬탈과 죽음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왕으로써 권력과 사랑을 모두 탐했던 게 그렇게나 큰 욕심이었나? 왕이 남자였다면 그런 건 문제도 되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 참 씁쓸하다. 감독도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감독이 여성인줄 알았는데 남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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