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이 글에는 결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산군 때의 장녹수, 광해군 때의 김 상궁(김개시), 인조 시절의 조귀인, 중종의 여자 경빈 박씨, 숙종 때의 장희빈.. 왕을 휘어잡고 국정을 뒤흔들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악녀로 평가 받는 여인들이다. 사극 드라마 속에서 이들이 간신들과 모략을 짜며 지었던 악랄한 표정과 간사한 웃음은 매번 여느 스릴러 영화보다도 더 나를 긴장시켰고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긴장했던 것만큼이나 나는 이 암투극에 더욱 빠져들었고 두려웠던 만큼이나 무시무시했던 그 여인들을 마음 한편으로는 은근히 존경했디. 가장 밑바닥에서 결국엔 계급의 꼭대기로 올라가 우뚝 섰던 그들이었으니까. 그들의 인생스토리는 나에게 뭔지 모를 묘한 쾌감 같은 걸 주었고 그때부터 줄곧 나는 모범적이고 선한 캐릭터보다 드라마틱하고 멋진 삶을 스스로 창조해 내는 빌런을 더 좋아하게 된 듯 싶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데미안’에서 가장 유명한 이 구절은 이 세상에는 선과 동시에 악이 존재하며 인간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악’이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깔려있다. 인정을 넘어서 심지어는 기리고 찬양해야 한다고까지 얘기하던 대목에서 다소 충격을 받았는데, 크리스찬이 ‘선’을 추종하고 찬양하듯 인간의 본성에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있는 ‘악’ 또한 그런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식의 주장이다.
처음에는 다소 놀라웠지만 결국 나는 이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찬양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우리의 내면을 차지하고 있는 악의 존재를 최소한 인정은 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 세상은 태초 이래로 약육강식의 법칙 하에 돌아갔다는 사실, 세상은 신의 ‘선함’만으로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멜랑콜리아’에서 저스틴이 내뱉었던 시니컬한 대사는 그래서 마음에 콕 박혀있다. 거대한 행성과 곧 충돌하여 없어지기 직전인 지구를 두고 저스틴은 이렇게 툭 내뱉는다.
“지구는 사악해. 그러니 애석해 할 필요 없어.”
이 쯤 되면 헤르만 헤세의 권유(?)처럼 우리와 공존하는 악의 존재를 같이 떠받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
인간에게 악을 가장 쉽게 행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내가 좋아했던 수많은 ‘악녀 시리즈 사극’과 마찬가지로 영화 ‘더 페이버릿’은 인간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욕망인 권력에 대한 욕망을 다루고 있다. 보통 사극과 다른 점은 여기서는 왕이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1700년대 초 영국 왕실 내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하는 이 영화는 당시 여왕이었던 앤과 그의 절친이자 동시에 연인이었던 사라, 그리고 이 사라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애비게일, 이렇게 세 여성의 긴장감 넘치는 치정과 권력암투를 그리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재미있어서 한 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극 중에서 드러나는 사라(레이첼 와이즈 배역)의 양면성은 헤르만 헤세의 주장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는 귀족에서 몰락하여 평민이 된 이후 온갖 수난을 겪어야 했던 애비게일을 가엾이 여긴다. 측은지심을 지니고 있는 사라는 궁에 시녀로 들어온 그녀에게 처음엔 크고 작은 배려와 선심을 베푸는 선한 모습을 보여준다. 의회의 중진 인물인 말버러 경의 위협 앞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 대담하고 당당한 모습과는 다르게 사회적 약자에게는 친절한 사라는 스스로도 직접 ‘나는 약자에게는 약하다.’고 말할 정도로 처음엔 호감형 인물이다.
그러나 여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일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왕과 국정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는 모습과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왕을 종종 싫증내고 우습게 보는 그의 이면에 관객은 곧 놀라게 된다. 애비게일(엠마스톤 배역)이 왕의 마음을 사자 그녀를 견제하다 못해 내치려고 하는 모습에서는 자신이 얻은 권력을 그 누구에게도 나누려 하지 않는 냉정하고 이기적인 면모 또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사라의 시녀로 들어왔던 애비게일은 이보다 더한 악마를 숨기고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이 이 영화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다시 귀족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으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성공한 애비게일은 이번엔 왕의 연인으로서 경쟁자가 된 사라를 퇴출시키는 데에 총력을 기울인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주인을 경쟁의 구도에서 제거하려는 그의 소름끼치는 노력과 시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눈엔 그다지 불편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는 이를 재미있는 비틀기와 약간의 유머코드를 섞어 넣어, 오히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신박하고 유머러스한 서스펜스로 바꿔버린다.
영화가 극찬을 받았던 요소 중 하나는 단연 세 배우의 미친 연기력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나약해 빠지고 히스테릭하게만 보였던 앤 여왕이 동시에 세 여인의 삼각관계 안에서 치밀하게 주도권을 잡아 나가는 놀랍고도 복합적인 면모를 갖춘 인물이라는 점을 올리비아 콜맨이 완벽하게 연기해 냈다. 사라의 애정이나 구걸하는 약한 멘탈에, 아이 같은 면이 다분한 앤은 권력을 장악한 사라에 비해 처음엔 약자의 위치에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애비게일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사라와의 역학 관계를 순식간에 뒤바꿔버리고 결국엔 입 안의 혀처럼 굴어주는 애비게일을 선택하면서 사라를 내치고 마는, 그는 셋 중 가장 무서운 권력의 주체이자 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세 명의 욕망의 화신이자 악녀들의 암투를 감독은 너무도 맛깔나고 흥미진진하게 연출해 내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특유 유머코드가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쉽게 구사할 수 없는 이상한(?) 유머코드를 잘 쓰는데 엉뚱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의 영화 ‘랍스타’만큼의 병맛 유머는 아니지만 란티모스식의 독특한 그 웃음 방식이 ‘더 페이버릿’에서도 마음껏 발현된다. 여왕 주관하에 열렸던 무도회에서 사라와 해리엇(조 알윈 배역)이 췄던 춤을 보고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 괴상하기 짝이 없는 그 춤을 당시 왕족과 귀족들이 아무렇지 않게 췄을리가 없다!)
남자 캐릭터를 희화화시켰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여기에 나오는 남자들은 모두 짙은 눈 화장은 물론이고 발그레한 입술과 정성스럽고도 과장된 볼터치를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성 귀족들은 언제나 한껏 치장(?)한 상태로 있다. 오히려 여성 캐릭터들이 화장하지 않는 민낯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온다는 점이 신기하고 또 약간은 의아했던 점이다. 풍성한 가발을 올려 쓰고 화려한 옷을 입은 남성 귀족들은 세 여성 캐릭터가 권력 사투를 벌이고 있는 시간에 우스꽝스럽고 하찮은 게임이나 즐기는 한심한 모습으로 연출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라와 얼굴을 맞대고 격한 논쟁을 벌이던 할리(니콜라스 홀트 배역)가 마스카라 번졌다는 사라의 면박에 분노와 수치심으로 몸을 떨었던 씬에서는 정말 빵 터지고 말았다. 마치 의도적으로 젠더역할을 바꿔놓은 것 같은 설정, 재미있다.
귀족들의 화려한 패션스타일만큼이나 영화 속 인테리어와 풍경, 디테일한 모든 미술이 눈부시고 아름답다. 이토록 아름다운 배경 안에서 일어나는 치정과 권력암투가 내는 불협화음 또한 대상을 한껏 비틀어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는 란티모스 식의 재미있는 연출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예술과 함께 헤르만 헤세가 얘기했던 아브락사스의 세계, 여자들이 벌이는 살벌한 권력암투의 정수를 감상하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영화 '더 페이버릿'을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