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그 즈음에서 같이 태어났다. 운 좋게도 나는 또래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비교적 딸 아들 모두가 평등한 대우를 받는 가정에서 자랐다. 오히려 세 남매 중 장녀이자 첫째로 태어난 덕에 자라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혜택을 더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도 나 다음인 둘째가 역시 딸로 태어나자 나의 할머니, 즉 엄마의 시어머니는 숙부에게서 태어난 장남을 우리 집안의 아들로 입양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꺼냈다. 종손의 집안으로서 조상들의 제사를 이어가야 할 아들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리 집안에서 모셔야 할 조상들은 고조, 증조,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까지 총 다섯 분이었고 공교롭게도 죄다 푹푹 찌는 한 여름에 돌아가셨다. 무더운 여름이 다 지나갈 때 까지 엄마는 거나한 제사상을 차리고 또 차리느라 땀을 뻘뻘 흘렸고 상이 다 차려지면 아버지와 남자 어른들은 상 앞에서 의식을 올렸다. 제사가 끝나면 엄마는 친인척 손님들의 밥상을 차리느라 또 다시 널을 뛰었다.
부모님은 자식들을 오히려 차별하지 않았으나 오가는 친 인척 어른들은 타고난 성별을 두고 우리를 종종 차별했다. 명절에 아버지의 고모할머니 집에 세배를 하러 갔을 땐 고모 할멈이 나를 탐탁치 않는 시선으로 훑어보더니 한마디 툭 내뱉었다.
“딸은 뭐하러 낳았냐, 아들만 있으면 되지.”
나는 내 귀를 의심했고 그 말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내가 만약 그 할망구 배속에 있는 아이였다면 나는 일찌감치 죽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남자애들은 지긋지긋하게도 나를 괴롭혔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악랄했던 몇 명의 이름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아이들이 괴롭히는 방법은 실로 매우 독창적이고 기상천외했다. 나는 거의 매일 울었다. 그러나 4학년 때인가, 울고 있던 나에게 담임이 했던 말은 아버지의 고모할머니가 던졌던 막말만큼이나 야속하고 충격적이었다.
“애들이 널 좋아해서 그런 거 갖고 뭘 그렇게까지 그러니!”
담임은 괴롭히는 남자애들을 비난하거나 혼내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타박했다. 옳다구나 싶었는지 남자애들은 강도를 높여 더 나를 괴롭혔다.
청소년시절부터는 여러 번 성추행을 당했다. 등하교 하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생각하기도 싫었던 불쾌한 경험을 당했고 때로는 위험했던 적도 있었다. 대학생 때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버스 안 옆자리에서 나를 만지던 남자가 무서워서 중간 아무데서나 내렸다. 그는 나를 따라 바로 내렸다. 숙대 앞이였나, 해가 진 이후였지만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는데도 인적이 드물었다. 순간 공포감이 엄습했다. 천만 다행히도 그 순간 한 아주머니가 곁을 지나갔고 나는 그녀에게 무작정 매달렸다. 위기를 그렇게 모면했다. ‘82년생 김지영’에서 그 때의 상황과 너무나도 흡사한 에피소드를 보여주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괴한이 버스에서 따라 내린 것과 한 아주머니로 인해 위험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던 상황까지 똑같았다. 예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숨이 막혔다.
어느 날엔 지하철에서 모르는 남자가 마치 나를 잘 아는 양, 아는 척을 해댔다. 졸고 있는 나를 깨우고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말 이상하게도 마침 내가 내리려던 버스환승역이었다.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아는 사람인지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다시 확인했지만 분명 모르는 남자였다. 남자는 내가 내린 역에서 나를 따라 내린 후 내 팔짱을 끼며 세상 둘도 없는 친한 척을 해댔다. 내가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도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역 안에서는 많은 인파가 있었지만 그 사람들 모두 어떤 연인이 싸우는 정도의 시선으로만 흘끗거릴 뿐이었다. 공포감이 온 몸을 뒤덮었다. 밤이었고 지하철역을 나가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역사 내 관리실로 뛰어 들어갔다.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던 아빠가 나를 데리러 왔고 나가려는 계단 입구에 나는 아직 그 자가 사라지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새끼는 옆에 있는 내 아빠를 보더니 등을 돌려 계단 위를 유유히 올라갔다.
‘한국에 살면서 성추행 한 번 안 당해 본 여자가 있을까?’
공지영의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나왔던 이 문장을 보고 나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한 번? 한번만 당해본 여자도 있을까?’
학창 시절에 남성교사들로부터 당했던 성희롱을 얘기하자면 끝도 없다. 동창 친구들을 만날 때면 그 얘기를 하면서 정말로 밤을 샐 수도 있을 정도이다.
중학교 때엔 친구 중 한명이 영어교사에게서 엉덩이를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아이가 완강히 거부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네 남편에게는 보여줄 거면서 왜 나는 안 되니?”
경악 그 자체였으나 우리는 미친놈이라고 하고 애써 웃기만 했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그 아이를 온전히 위로해 주지는 못했다. 왜 그랬었는지 후회가 된다. 체육 교사 중 한 놈은 중학교 3학년이 된 여학생들의 발육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우리에게 종종 이런 말을 해 댔다.
“가슴 자랑하니?”
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 뒤 쯤, 한 신문사 구석쯤에 있는 단신기사에서 그 학교 내의 교사 중 한 명이 성폭행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런데 그 교사는 놀랍게도 우리가 예측했던 변태 영어교사나 체육교사가 아니었다. 학생을 성폭행 한 교사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그 학교 무슨, 도가니야?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교사들의 성희롱과 성추행 강도는 더욱 심해졌다. 아니, 상상을 초월했다. 그 중 생물 교과를 가르치는 나이 지긋하던 교사는 교과서 내용은 하나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가 가르쳤던 대부분의 교과(?) 과정은 ‘바나나와 조개의 열정적인 만남’이었다. 그 할아버지 입에서 바나나와 조개라는 단어를 한 만 번쯤은 들었던 것 같다. 그는 한 번 여자가 강간당하여 생식기가 파괴되었다는 사건을 여학생들 앞에서 생생하게 묘사해 주었다.
“바나나가 조개를 어찌나 후벼 팠던지 말이야..!” (지어낸 얘기가 아니다. 절대적 실화이다.)
그 밖에 여대생, 여배우, 여교사, 여의사 등에게서 어마어마한 판타지를 가졌던 한문 교사, 고 1때 가장 친했던 친구의 집을 알아내기 위해 그 아이를 몰래 미행했던 교련교사(교련이라고 하니 너무 노땅 티가 난다.), 여자의 가슴과 엉덩이에 집착했던 서울대출신 체육교사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모두 제치고도 남을 최대 공공의 적은 바로 고1때의 우리 담임이었다. 그는 오픈된 장소인 교실에서 반 학생 한명 한명을 손수(?) 쓰다듬는 걸 좋아했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목을 타고 넘어와 등의 브래지어 있는 곳까지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더러운 손놀림은 보는 사람도 역겹고 당하는 사람은 더 지옥이었다. (차마 가슴으로는 못 내려왔나 보다.) 친구들은 그 놈이 만지고 난 얼굴 전체에 그의 싸구려 스킨 냄새가 깊숙이 밴 채로 집까지 가야 했다. (사실 난 그런 치욕을 운 좋게도 당하지 않았었는데 엄마가 자주 학교를 와 줬던 탓이었다. 엄마찬스, 땡큐, 맘!)
담임은 수업을 하다 말고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내고는 했다.
“여자 셋이 모이면 뭐가 되는지 아니?”
그렇게 질문을 던진 그는 그 답을 누구보다도 먼저 얘기하고 싶어서 안달 난 마냥 바로 답을 얘기해줬다.
“육젖”
몰카 범죄는 최근에 와서 이슈가 불거졌으나 실질적으로 큰 공포를 느꼈던 경험은 대학생 때였다. 당시 의상학과 여학생 화장실에 한 남자가 숨어서 엿보거나 사진 촬영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때부터 학교 화장실보다는 학교 앞 식당이나 카페 화장실을 가려고 노력했으나 어쩔 수 없이 과 내 화장실에 가야 할 상황이 오게 되면 앞 뒤, 양 옆, 아래, 위 모두 확인하고는 들어가고는 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친구들과 우루루 몰려간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 네 칸의 모든 화장실 변기 안에 쓰다 버린 생리대를 펼쳐서 똑같이 넣어 놓은 현장을 보고 말았다. (그는 아마 숨어서 우리의 놀란 표정을 보고는 또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그 놈의 신상은 졸업할 때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퇴학처리나 다른 징계처리가 되었는지도 불분명했다. 우리는 계속 불안에 떤 채로 학교를 다녀야 했다.
82년생 김지영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지 않을 리 없었다. 지금은 보이지도 않고 찾기도 힘든 첨단 몰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는지 예측할 수도 없다. 그 피해자중 내가 있어도, 내 사진이 소라넷과 같은 사이트에 떠돌아다녀도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아니,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낫지, 알고 나면 제 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이 밖에도 수도 없지만 성폭력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겠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이런 얘기들을 나열하는지 혹시 이해가 되지 않거나 지겨울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읽는 남성 독자들이라면 더욱 말이다. 몇 달 전 국민의 힘 당대표 이준석이 ‘82년생 김지영’을 두고 이런 얘기를 뱉었던 적이 있다.
‘살면서 어쩌다 한 번 겪을 일을 갖고 대한민국의 운 나쁜 여자들의 모든 경험을 한사람의 경험처럼 집약해 놓은 과장된 스토리이다.’
나는 그렇게 명석하다고 소문난 이준석의 우매하고 무지하다 못해 무신경해 빠진 발언에 실망을 넘어 절망과 분노를 느꼈다.
‘네가 어떻게 그리 잘 아니? 우리 입장이 되어 봤니?’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그 무신경한 얼굴에 대고 이렇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준석은 그 비슷한 여러 가지 발언으로 남성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이 된 나는 이번엔 디자이너보다 기획MD와 패턴사들의 연봉이 더 높다는 사실을 알고는 의아해 하게 된다. 매출의 핵심역할을 하고 그래서 회사의 실적을 끌고 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부서에 있는 디자이너보다 타 부서 직원들의 연봉이 더 높은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었다. 디자인 팀은 여성이 대다수였고 당시 기획MD와 패턴사들은 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류 회사 특성상 여직원 수가 남성보다 훨씬 많았지만 브랜드 본부장 급으로 올라가는 사람 또한 많은 경우 남성이었다. 이건 아직까지 그렇다. 심심치 않게 보는 통계에는 아직까지 평균적인 여성임금이 남성의 70%수준을 밑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같은 업계에서조차, 특히 여초 세계에서조차 남성의 임금이 높을지는 몰랐다.
혼기에 들어서자 결혼문제는 이직 면접을 볼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주제였다.
“결혼 생각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그냥 넘어가면 다행이지만 개 중 무례하고 개념 없는 면접관들은 이어 다음 질문을 했다.
“그럼, 현재 남자친구는 있습니까?”
심지어 친한 디자이너 언니 중 한 명은 첫째에 이어 둘째 계획이 있느냐는 가족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까지 요구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비혼이라 기혼 여자들의 삶에 대해 구석구석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내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 중 가장 큰 요인은 가부장제 안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질 성 차별 때문이었다. 아내와 며느리로서 짊어져야 할,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해 낼 자신도 없었던 의무 때문이었다. 남동생과 차별 당하지 않고 자랐던 나였어도 자신이랑 상관없는 조상의 제사상을 허리 휘어지게 차리고 있던 엄마의 가엾은 모습은 지금까지도 계속 기억에 남아 있다. 제사와 명절 문화는 아직까지 한국인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면접 때 가끔 가족계획에 대한 질문 때문에 불편해 해야 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지금도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던 하지 않던, 육아와 가사의 훨씬 많은 비중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나는 회사가 지겨워서 나온 케이스이지만 회사를 다니고 싶어도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쳐 경력 단절을 당하는 여성들이 사실 더 많을 것이다. 본인의 의사와 선택이 아닌, 육아와 가사노동의 우선적인 책임자로서 이들은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할 권리조차 빼앗긴다.
뭐 그런 것 갖고 김지영씨처럼 정신병까지 걸리냐고? 그렇게까지 소란스러울 일 뭐 있냐고 쉽게도 얘기하는 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당신이라면 이 모든 차별과 폭력을 아마 절반도 감내해 내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사회적 약자의 입장은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함부로 판단하는 게 아니다. 약자의 입장은 약자에게서 듣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당신들의 판단 대상이 아니다.
소설과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현재 진행형인 한국 여성들의 삶이다. 운이 나빴던 여러 여성의 부정적인 사례만을 끌어다가 집대성한 보고서가 아니다. 입 밖으로 마음대로 꺼내지 못했던, 불편하고 숨 막히는 우리나라 개개인 여성 삶의 리얼리티이다. 금기시 되던 우리의 목소리,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을 한 번쯤은 꼭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