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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이라는 단어가 특별하게 와닿았던 때는 지난 9월에 있었던 박준 시인의 북토크에서였다. 그는 "인간의 지식과 정보는 돌직구 던지듯이 빠르게 정확하게 전달하지만 인간의 감정과 정서는 빠르면 전달이 안된다. 느리고 부정확하고 유치하게, 커브볼, 너클볼이면 전달이 잘된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인문학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나와 너이고 인문학은 답보다 질문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해하려고 하는 나의 노력을 꺾지 않는 것이다. 시, 문학,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나와 너를 대하는 태도이다."라고 하였다.
전에는 철학이 담긴 역사책이나 소설 등을 볼 때 어떤 책은 이해가 잘 안돼서 진도가 안 나가는 것을 답답해하였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곰곰이 생각하고 찾아보고 천천히 느껴보고 되새김질해 본다. 세르비아 작가 조란 지브코비치의 『환상도서관』을 읽을 때에도 어떤 장면에서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 속에서 고요해지고 멍해졌다.
아멜리 노통의 소설 『머큐리』를 읽었다. 그 책을 보기 전에 독자들의 리뷰를 먼저 살펴봤더니 다음과 같은 것들이 리뷰 상단에 먼저 보였다.
"정신 나간 늙은 노인네의 더러운 욕망과 사람으로 미화시키고 싶어 안달 난 내용 같음", "추잡한 늙은이..", "세 인물 모두 혐오스럽고 고집스럽다. 그러나 매력적이며 때론 옳다....", "역겨움과 공존. 그리고 부정한 건 사람을 항상 끌어들인다."
책을 다 읽어보니 그 리뷰들은 독자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는 것으로, 더럽고 역겹다는 것은 다름 아닌 허구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아멜리가 소설에서 무엇을 의도하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과는 다르게 머큐리를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에 빠져들었다.
이어지는 서사마다 장면들이 가상의 스크린으로 투사되고 목소리가 들리고 향기를 맡았다. 내 가치관을 이입하지 않고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나오는 것처럼 무비판적 감상을 하며 보았고 아멜리의 유머와 기발함에 깔깔 웃으며 매우 재밌었고 존재와 관계에 대한 사유도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매일 죽음의 경계 'mort frontiere'에 살고있는 우리 인간에게 문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속삭이는 아멜리의 예쁜 인류애를 느낄 수 있었다.
소설 머큐리는 노인 롱쿠르 선장과 간호사 프랑수아즈의 재치 있는 티키타카 같은 대화처럼 빠른 템포로 읽을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미묘한 뉘앙스를 이해하고 느끼려면 보다 느리게 읽어야 하고, 롱쿠르 선장이 다음과 같이 언급한 여러 책들도 읽고 보는 게 소설 속 존재들의 관계와 심리, 정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아멜리는 노인 롱쿠르 선장의 입을 빌려 "좋은 책을 읽다 보면 사고의 폭도 넓어질 테니까"라고 하며, 직간접적으로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 스텅달의 파르마의 수도원, 세리든 래 피튜의 카르밀라, 체호프의 바냐아저씨, 그 외에도 수십 권의 교양필독서들을 언급한다.
프랑수아즈는 하젤에게 "난 지금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문학의 힘을 발견하고 있는 중이에요, 이제 책 없이 못 지낼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하젤은 프랑수아즈에 대답하기를 "문학에는 해방의 힘 이상의 것, 구원의 힘이 있어요, 문학이 절 구해주었어요, 문학은 천일야회에서 셰에라자드의 목숨도 구했죠. 언젠가 당신에게도 구원이 필요한 상황이 온다면 문학은 당신도 구해줄 거예요."라고 하였다.
"모든 소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떤 소설들은 고도의 정보 종합 능력이 요구되며, 그래서 느리게, 책 속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세부 사실이 머릿속에서 함께 울리게 하며 읽어야 한다. 다성적이고, 불연속적이고, 서로 무관한 듯 보이지만 하나의 동일 주제로 얽혀 있는 그 복합적 구성 때문에 그렇다. 그런 소설을 '숏폼'을 소비하듯이 읽고, 삶을 또 그렇게 읽으려 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유머를 유머로 인지하지 못하고, 몽상과 현실을 구분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저 여기저기에서 단편적으로 주워듣는 자극적인 짧은 단언들로 타인과 세상을 판단하게 되지는 않을까?" - <문학의 쓸모, 앙투안 콩파뇽 저 235p. 뮤진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