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나와 아이들의 도서관 대출증 네 개를 모두 활용해서 최대로 대출받는다. 권당 대출 기간은 기본 2주에 1주 연장해서 3주이고 인당 다섯 권이니 스무 권까지 빌릴 수 있다. 그렇지만 3주의 기간 동안 스무 권을 전부 완독 하기란 쉽지 않다. Marcel Proust의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같은 3부작은 3주도 부족할 수 있다. 회사에서 일하는 척도 해야 하고 외부 강연과 수업도 많이 듣고 있기에 독서에 할애할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다. 그런 연유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빌려와서 한 쪽도 못 읽고 반납하는 책이 많아 박준 시인처럼 나도 '책 옮기는 사람'인가 라는 자괴감이 들었고 내 눈에 띄기 위해 애틋한 까베세오를 보낸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독서의 방법을 바꾸기로 하였다.
그래서 일단 빌려온 책은 조금이라도 '파악'하고 돌려보내기로 하였다. 먼저 책 뒤편에 있는 에필로그, 맺음말, 편집자 노트, 작품 해설, 역자 노트를 읽은 후, 책 앞으로 가서 역자 서문, 저자 서문, 프롤로그, 그리고 수십 쪽의 첫 1장을 정독한다. 이렇게 읽고 나면 당장은 다른 우선순위의 책들 때문에 바로 다 못 읽더라도 나중에 이어서 계속 읽고 싶은 책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쓴 『생각의 탄생』도 너무 좋은데 도서관 반납기에 반납 찍고 바로 재대출 받을 수 있는 가까운 도서관이 아닌, 원거리 도서관에서 상호대차로 빌린 책이라 2장까지 보고 일단 반납해야 했다.
나머지 책들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씩 책의 앞뒤를 읽고 있고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프로코피우스의 『비잔틴제국 비사』
『김대식의 로마 제국 특강』을 읽은지 얼마 안지나 타도서관에 북토크 들으러 갔다가 서고에서 우연히 그러나 필연으로 눈에 들어온 책이다. 저자인 프로코피우스는 6세기경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활약했던 장군 벨리시리우스의 비서 겸 법률 고문을 역임한 비잔틴의 저명한 역사학자이고 당시 역사서인 『전쟁사』의 저자이다. 하지만 그는 공식 기록으로 남길 수 없는 제국의 어두운 이면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가족도 모르게 기록한 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거다. 1장만 봤는데 '겁나게' 재밌다. "으하하~~ 꺄꺄꺄~!" 완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이다. 황제와 친인척 그리고 측근들의 은밀한 뒷이야기를 세상에 얼마나 알리고 싶었을까. 이런 비사 어디 또 없을까. 너무 재밌다. 언제가 되든 꼭 다 읽을 책이다.
『세상은 신화로 만들어졌다』 리처드 벅스턴 지음
"약 3000년 전에 에게해 지방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들은 오늘날까지 인류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고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다. 당시는 폴리스라고 알려진, 특징적인 도시 국가의 구조가 발달하던 시기였는데 작은 공동체에서 미미하게 전해져 오던 이야기들은 엄청나게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이 이야기들은 헬리니즘 왕국에 흡수되었고 헬레니즘 왕국이 로마 제국에 굴복되자 로마인들은 그리스 신화를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게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 멸망 후 수 세기 동안, 이 이야기들은 유럽 문명의 흐름에 맞추서 각색되었고, 유럽 문명이 팽창함에 따라 더욱 멀리 퍼져나갔다.
오늘날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식 논쟁이나 도덕적 딜레마 또는 정치적 위기를 떠올리기는 어렵다. 비즈니스 프로젝트와 광고, 마케팅에 있어서 그리스 신화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는 보물 상자다. 이에 더해 그리스 신화의 분명한 존재감은 연극과 시, 만화책, 게임을 포함하는 사실상 모든 예술 매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 프롤로그 발췌
위의 서문에 적혀있는 것처럼 신화가 안 쓰이는 곳이 없음을 세상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알게 되고 그래서 이참에 신화에 대한 공부도 시작해야겠다 싶어서 책을 골랐다. 이것도 완독 예정이다.
『발칸의 역사』 마크 마조워 지음
'환상 도서관' 글에 적었듯이 재작년에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를 여행하고 오니 발칸의 역사가 궁금해져서 고른 책이다. 남동유럽, 발칸산맥 지역 국가에 대한 역사책은 상대적으로 매우 희귀한데 이 책은 발칸 국가를 이해하기에 아주 도움이 되는 참 잘 쓴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시대별로 발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지가 이미지로 그려지고 상상이 된다.
프롤로그 첫 문단에는 세상사람들이 발칸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을 지적하는 듯한 니체의 글이 아래와 같이 인용된다.
"흔히 사물의 척도와 중요성의 기준이 되는 - 애초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제멋대로이기 십상인 - 명성, 이름, 외양, 이 모든 것은 단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대손손 그 중요성이 커져오다, 마침내 사물의 일부가 되고, 그러다 결국 사물 그 본체로 화하게 된다. 처음에는 외양에 불과했던 것이 나중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본질이 되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2년전 비엣남 여행 중 콩카페에서 이북으로 읽은 잭 트라우트의 『포지셔닝』 책에는 이런 말도 있다. "진실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마인드에 존재하는 인식이다. 포지셔닝 사고방식의 핵심은 인식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인식을 재구성해 원하는 포지션을 창출하는 것이다. 나중에 우리는 이 과정을 '밖에서 안으로 보는' 사고방식으로 정의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귀한 책이다. 아직 안 가본 코소보,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를 언젠가 여행하기에 앞서서 꼭 봐야 할 책이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차이, 유럽의 전쟁사, 세계사의 흐름에 있어서 지리의 영향은 거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크다는 것을 이 책을 보면서 다시 알게 된다. 조만간 끝까지 읽을 책.
『물의 시대 기록, 살인, 그리고 포르투갈 제국』
에드워드 윌슨-리 저
작년에 처음 가본 포르투갈의 리스본과 포루투가 인상적이었고 더 알고 싶어서 골랐다. 16세기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 근대를 목격한 두 남자의 이야기로 역사를 기록하는 자 다미앙 드 고이스의 기묘한 죽음, 국민 시인으로 등극한 문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의 방랑 그리고 역사와 인생에 대한 질문을 침묵시키려는 거대한 음모에 관한 책이다. 이 책 역시 1장까지 읽었고 당시의 모습들이 시야에서 잘 보인다. 이 책도 또한.
요즘 나의 일상의 시간들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너무 좋을 것 같은. 며칠 전 서울대 뇌인지과학과 이인아 교수의 특강이 있었다. 다른 장기와는 달리 뇌는 사용하기에 따라 계속 오르막길이 된다고 하였다. 뇌세포는 안 쓰면 사멸하지만 (명퇴하고 머리를 안 쓰면 폭싹 늙는 이유) 뇌한테 계속해서 일을 시키면 자기가 몇 살인지 모르고 더 젊어진다. 새로운 걸 보고 계속 학습하는 것, 유전자의 영향은 초반에는 드러나 보일 수 있겠지만 슈퍼파워는 아니고 뇌의 학습은 후천적인 것이 99%이다. 책의 활자는 심볼이고, 글을 보면서 상상해 보고 자꾸 변형해 보고 비틀어봄으로써 뇌의 해마를 훈련시킨다.
계속 생각하고 상상하고 질문을 던지고 공감각(Synesthesia)하고 다감각적(Polysensual) 이미징을 하다 보니 그게 매일매일 더 나아지고 발전하는 것을 지각하게 되어 즐겁다.
다음으로 맛볼 책은 밀로라드 파비치 장편소설 『하자르 사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