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by Loche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대출받아왔고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The Reader - 번역본 제목은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이북으로 먼저 읽고 있다. 등장인물로 각각 해나(Hana)와 한나(Hanna)가 나오고 두 책 모두 영화화되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해나는 심한 화상을 입고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영국인 환자 알마시에게 책(주로 헤로도토스의 역사)을 읽어주고 간호한다. 더리더에서는 15살 미하엘이 36세 한나와 사랑을 나누기 전에 여러 책을 읽어준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도 더리더도 유려하고 시적이다. 구절구절들이 파도치듯이 가슴 안으로 진하게 스며들어온다.


이런 느낌 좋다. 느리고 잔잔한. 몸의 특정 부위가 아닌 머리 목 가슴 배 팔 손 다리 발까지 전신이 고르고 미세하게 흔들린다.


입사한 지 20년 만에 독립 사무실이 생겼다. 스스로 고독하기를 원했기에 무리와 어울리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뻔한 혜택과 권리도 못 누렸다. 조직 개편을 하면서 하나를 양보하는 대신에 하나(독립 사무실)를 얻기로 하였으나 우여곡절 끝에 둘 다 가졌다. 늘 그래왔듯이 운은 내 편이다. 악운으로 보이는 것조차도 나에게는 큰 행운으로 탈바꿈한다. 내가 조직에서 유일하게 바라는 것은 고독과 자유다. 나 건드리지 말고 시간 뺏지 말아 줘. 자르지만 않으면 돼.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바라보든 난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아. 난 잘 살고 있고 행복하니까. 각자 행복한 대로 살면 되는 거 아니겠어.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 되는 거고.


순간은 일회적이지만 시적인 경험과 감각은 오래 남는다.


계속되리라 생각했던 순간들이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때뿐이었음을 깨닫는다.


일 년 전 11월 14일의 조우는 불타오르는 관계의 최고조고 몇 시간 후 브라질로 떠났다. 돌아와서 당연히 다시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끝이 났고 긴 숙고 후에 나는 지워지지 않는 점을 내려놓았다.


커다란 대형 풀장. 오래오래 쓸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처분을 고려하고 있다. 더 쓸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마당이 있는 주택도 어느 시점이 되면 팔아야 할 것 같다.


엄마도 언제까지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노인은 겉으로는 건강해 보여도 세상을 떠나는 건 건강과 무관하다. 만날 때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조직도 그때뿐이다. 조직을 나가는 순간 내 존재는 사라진다. 지금 나에게 잘해주려는 사람들에게 잘하자.


시인처럼 내 의식의 너비와 깊이를 확장함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도 순간이다. 이날 만남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색이 바래지고 여운이 바스락 내려앉는다


시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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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