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음악회

감성의 워밍 업

by Loche


대전시향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를 한다고 해서 가봤다. 중학생 때 소니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로 자주 들으면서 좋아했던 곡이고, 가장 최근에는 2022년도 11월에 LG아트센터에 가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다비드 라일란트 지휘로 본 적이 있다.


같은 레퍼토리로 대전예당에서 이 공연 직전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대학교에서 무료로 하는 것이었다. 그 학교는 독지가들의 기부금을 아주 많이 받는 학교라 학생들과 지역 시민들을 위한 수준 높은 연주자와 단체도 많이 초빙한다. 그래서 그 학교 홈페이지 문화행사 탭은 내 폰의 공연 예술 사이트 모음에도 들어있고 종종 어떤 공연이 있는지 들여다보곤 한다.


대전예당 공연 일정도 주기적으로 확인하기에 예당에서 하는 것은 알았으나 티켓팅을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안 샀다. 왜냐하면 대전시향이어서. 내가 보기에 대학 아마추어오케스트라보다 조금 잘하는 정도의 수준이고 섬세함과 Musicality가 없어서 대전 살이 초기에 시향 공연 몇 번 보러 갔다가 더 이상 안 가보게 되었다. 내가 지불한 표값과 나의 시간을 보상받을만한 가치를 못 느껴서. 하지만 이번 학교 공연은 무료이니 며칠 전에 일단 예약을 해놓았고 공연시작시간 두어 시간여를 앞두고 가보기로 결정하였다.


홀 입구에 놓인 공연 팸플릿을 보니 학교 홈페이지 문화행사 간략 공지에 안 보이던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도 들어있다. 오호 그럼 더 볼만하겠다. 이 곡은 혼자서 연습을 많이 했던 곡이고 내가 많이 좋아하는 곡이다.


고개를 돌려 홀을 주욱 둘러보니 간단한 다과도 세팅되어 있었다. 따뜻한 차를 나눠주시는 분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누구시더라.


공연이 시작되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첫 번째 곡이 끝나고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이 시작되었다. 처음 보는 연주자, 어떻게 연주할까. 좀 들어보니 그냥 평범하다. 교향악단의 연주도 밋밋하고 색깔이 없다.


"소리를 내는 저 안쪽 자리에서 연주자로서 공명하는 것은 청중으로 공명하는 것과는 차이가 큰데 연주자들은 좋긴 하겠지? 나도 언젠가 오케스트라 단원 의자에 다시 앉을 날이 올까? 같이 연주하면서 가슴이 큰 진폭으로 공명하는 느낌이란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


하지만 이 에너제틱하고 감성적인 브루흐의 곡을 이렇게 매카리 없게 연주하다니, 실망.. 그래 역시 대전시향답다. 곡이 끝나자마자 박수 하나 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마음에 없는 박수는 치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다시 따스한 차 한잔을 받으러 가서 그분의 얼굴을 또 보게 되었다. 누굴까.. 아~ 이제 기억난다.

아파트 살 때 전주인의 부인이네. 남편이 이 학교의 잘 나가는 교수였는데 할리 데이비슨으로 출퇴근하는 사람이었고 강원도에 오토바이로 학회 다녀오다가 사고로 국도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분. 아파트 매매할 당시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아는 척은 안 했지만 아마 그 부인도 나를 알아보지 않았을까. 학교 교직원으로 취업하신 것 같았다. 사람의 운명, 그리고 인연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봤다. 아이 두 명은 지금 다 컸겠지. 오토바이 너무 위험해.. 한 번의 사고가 치명적이니. 아무리 조심해도 차가 갑자기 달려와서 들이받으면 그걸로 끝이다. 할리든 뭐든 간에. 아들 내미가 군대 가기 전에 오토바이 딸배하겠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오토바이도 사야 하고 딸배 보험료는 일반보험료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을 알고는 단념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자, 드디어 기대하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가 시작되었다. 앞의 두 곡의 라이브 공명으로 인해 몸이 적당히 달궈졌다. 오디오로 세계적 수준의 관현악단 음악을 듣는 것보다 수준이 떨어지긴 해도 라이브로 생음악을 듣는 것은 체감 차이가 크다. 몸의 반응이 다르다. 확연하게 차이가 느껴지는 것은 발바닥이다. 발바닥이 뜨끈뜨끈해졌다. 이게 좀 더 발전하면 척추에서 등골을 타고 정수리로 찡하게 올라온다. 명상이나 수련할 때와 비슷한 세포의 활성화. 그래서 웬만하면 라이브 연주는 뭐가 되었던지 간에 기회만 되면 보러 가는 편이다.


지휘자가 여자인데 헤어스타일은 남자 머리 스타일이지만 지휘의 에너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그의 지휘를 보며 음악을 듣는데 이게 무슨 느낌일까 계속 생각했다. 다비드 라일란트가 지휘했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다비드의 호흡에 오케스트라가 하나가 되어 아라비안나이트의 천일야화가 상상되었고 아름다웠으나 이분의 음악은 어떤 느낌이었냐 하면 이도 저도 아닌 중성화 수술을 받은 듯한 존재의 모호함이었다. 음악에서 술탄 샤리야르를 볼 수 없었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헤라자데의 존재도 느낄 수 없었다. 이 곡은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잘 표현해야 하는 게 핵심인데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가 두리뭉실하니 음악이 겉돌았다. 그래 역시 대전시향답다. 너희가 원래 그렇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헤라자데는 일반적인 교향곡과는 달리 4악장으로 구성된다. 3악장이 끝날 때 객석에서 박수치는 사람이 조금 있지 않을까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단 한 명도 없었다. 박수를 치려는 조짐조차 한 명도 안 느껴졌다. 우와~ 대단하네!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와서 음악회를 볼 정도면 대전에서도 상당한 교양과 수준이 있는 분들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준이 높건 낮건 같은 곡을 여러 다른 연주단체들의 음악으로 보고 듣는 것은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 나는 가슴으로 공명하는 것은 포기하고 구조와 공간을 보기로 하였다. 음악을 들으며 지휘자처럼 파트별로 살펴보았다.

음악이 흐르면서 어디서 어떤 악기들이 역할을 주고받는지, 하나하나 입체적으로 세세하게 보았다. 대고와 팀파니, 심벌즈, 트라이앵글 같은 타악기 파트의 개별적 연주도 관찰하였다. 대고가 아쉽군 너무 거칠어. 바이올린 솔로의 하모닉스 부분 아이고야 운지가 조금 낮네, 스피카토 할 때 강약 조절이 섬세하게 안 되는 것도 눈에 띈다. 원래 어려운 거지 활을 현에 튀기는 것만으로도 쉬운 게 아니니. 첼로 솔로의 커넥션도 끊어지고.


그래도 이렇게 무료로 심포니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어디야, 고맙고 감사해. 새해의 첫 라이브 음악으로 몸의 예술 감성과 감각을 깨울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거니까. 4악장의 마지막 음이 사라지고 몇 초간의 빠우사가 이어진 후 지휘자의 손이 내려감과 동시에 관객들이 큰 박수를 쳤고 나도 팔을 크게 휘저으며 박수를 쳐줬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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