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연결
모 연극제의 전야제 공연과 마지막 공연을 보았다. '모'라는 모호한 표현을 쓴 것은 좋은 말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이다. 다 알겠지만 직접적으로 명칭을 밝혀가며 비평하지는 못하겠다.
A.
첫 전야제 공연을 보다가 15분쯤 지났을까.. 소극장과 대극장 중에서 대극장을 무대로 세팅해 놓았길래 공연 시작 전에 기대를 하게 되었지만 인트로의 첫인상이 워낙 안 좋았고 달라질 기미가 안 보여서 도중에 기대를 접고 밖으로 나왔다. 안 좋게 본 점은 다음과 같다.
1. 의미 없는 파열음을 낸다. 그냥 시끄럽고 귀가 몹시 아팠다.
지금은 그만뒀지만 탱고를 하면서 배운 것이 있는데 모든 걸음은 버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 한 걸음이라도 헐겁게 뼈로 걸으면 안된다. 커넥션(연결)을 유지하려면 뼈가 아닌 근육의 텐션으로 걸어야 한다. 탱고를 안 하는 일반인들에게 이해가 되려나. 배우의 말과 움직임의 모든 것이 탱고의 걸음처럼 다 살아있어야 하고 매끄럽게 연결이 되어야 한다.
피아니스트의 실력 차이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지만 그중 하나는 '스케일'의 광범위함이다. 임윤찬의 연주는 건반 타격의 아주 큰 소리와 아주 작은 소리 사이에 수많은 음역의 연속성을 보여주며 귀에 전혀 거슬림 없이 섬세하고 뭉그러짐 없이 귀에 들어온다.
연극배우의 쇠가 갈리는 듯한 거칠고 불연속적인 소리는 극의 내용과 아무런 연결이 없는 그냥 내지르는 소음에 불과했다. 극의 커넥션을 끊기도 하고 관객의 가청 한계를 고려하지 않는 청각 폭력에 가까웠다. 알베르 까뮈의 '계엄령'를 원작으로 한다고 해서 기대를 크게 가지고 갔는데 까뮈를 그렇게 표현한다는 게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2. 배우의 숫자는 많고 나름 규모가 커 보였지만 움직임이 단조롭고 거칠고 저급한 비속어를 내뱉었다. 거장 까뮈를 욕보이는구나. 메가폰 소리로 귀가 아프기도 했다. 훌륭한 공연의 음역대는 아무리 높아도 귀가 아프지 않다. 고작 몇 음역대 밖에 사용 안하면서 그 조차도 크게 더 크게 더 악쓰며 질러대는 소리와 우르르 우르르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움직임도 특별한 맥락을 찾을 수 없었다. 까뮈가 이 공연 리허설을 미리 봤다면 노발대발하고 집어 치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내가 고작 이런 걸 보려고 소중한 시간과 차비를 들여서 왔나 싶어 허탈했고 그 실망감의 여파로 다음날 개막일 공연도 안 가게 되었다. 애들과 같이 안오길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다가 일주일이 지나서 그 실망감이 어느 정도 사라지니 연극제 후반부 공연이 궁금해졌고 폐막공연 전날에는 중국 극단 초청 공연이라길래 그래도 뭔가 그들만의 다른 점이 있지 않을까 해서 다시 혼자서 가보게 되었다.
B.
고양이 역할을 하는 남자와 상하이에서 야근이 일상인 직장의 노예처럼 힘들게 사는 여자가 하는 2인극이었고 무대 소품도 종이 박스 몇 개 갖다 놓은 초저비용 작품이었다. 이들도 역시 불필요한 동작이 많았지만 그래도 무대 뒤쪽의 자막 영상과 음악의 조화는 좋았고 감성을 자극하였다. 하지만 이들 공연을 보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이 두 사람과 연출자 등을 초청하기 위해서 비용이 얼마나 들었을까였다. 상하이 왕복 티켓과 호텔과 식비, 출연료 다 합하면 얼마나 될까. 별로 많이 안 들었을 것 같은데. 국제연극제라는 명칭을 갖기 위해 외국 공연팀을 초청하였지만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고심하지 않았나 싶었다. 초청하는 배우들의 숫자가 늘수록 비용이 곱절로 늘어날 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연극계 실상에 대해서는 공연에 앞서서 오후에 참여했던 연극 창. 제작 학술행사에서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 적어보겠다.) 그래도 사람의 심금을 움직이는 것이 있었고 상하이 사회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어서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공연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배우들과는 뭔가는 다른 그들의 억양도 독특했고.
C.
어제 중국극단 공연이 나름대로 울림이 있었기에 오늘 폐막일 작품도 가보게 되었다. 어제는 소극장에서 했는데 오늘은 대극장이었고 관중들도 많이 왔다. 어제 시작 전에 관계자분과 우연히 대화를 하였는데 오늘 마지막 공연 배우들이 주로 젊은 배우들이라 패기는 있지만 완성도는 높지 않을 것 같다는 뉘앙스의 암시를 주었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공연 시작한 지 몇 분 안 지나서 알게 되었다. 그렇구나. 그게 그런 의미였구나.
전야제 공연만큼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감상의 한계에 도달해서 더 이상 봐도 뭔가 새로운 감흥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전야제처럼 바로 나가지 않고 끝까지 자리에 남아있었던 것은 내 양 옆에 점잖고 교양 있어 보이는 두 여성분이 앉았고 그분들의 연극 감상의 흐름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내 왼쪽의 여자분은 내가 자리가 비었냐고 물어봤을 때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끄덕이는 표정 그리고 입술 모양과 눈매가 매혹적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분이 뿌린 향수 내음이 공연을 보는 내내 나의 후각을 잡아당겼다. "이 향수의 원료는 무엇일까, 단일 원료는 아닌 것 같고 몇 가지 베이스가 섞인 것 같은데 절묘하게 Seductive 하군. 옆에 앉은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남자는 남편일까?" 손을 잡고 있는 건가 아닌가 쳐다보고 싶었는데 그건 좀 아닌 거 같아서 얼굴은 정면을 향한 채로 눈알을 최대한 왼쪽으로 돌려서 쳐다보곤 하였다. 웬지 나를 남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상상은 자유롭다) 한편 공연장 안 공기의 흐름은 스윙을 하는지 바람이 왼쪽에서 내 쪽으로 흐를 때 향수 냄새가 났고 바람 방향이 바뀌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때마다 다시 그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90분짜리 공연인데 1시간 넘게 지난 것 같으니 나가는 걸 포기하고 계속 멍하니 무대로 시선만 향하며 내 의식은 배우들의 재미없는 연기 대신 컬러풀한 조명의 변화와 옆자리의 여성과 그녀의 향기 사이를 왔다 갔다 하였다.
공연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질러대는 <'말' 같지 않은> 소리들.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소음 지르는 것 밖에 할 줄 아는게 없구나. 무브먼트의 섬세함도 전혀 없다. 몸통에서부터 손가락끝과 발가락끝으로 뻗어나가는 각 관절의 연결과 미세한 움직임, 표정 그리고 시선의 방향과 눈빛의 섬세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배우가 한 명도 없어 보였다. 나처럼 해외여행을 다닐 때마다 일부러 주요 Theatre를 찾아다니면서 공연을 보는 매니아에게는 그 차이가 극명하게 보인다. 이 배우들은 냉정하게 말해 발전 가능성이 없는 배우들이다. 기본기가 없으니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금까지 몸에 밴 악습관을 다 뜯어고쳐야 하고 그건 배우 경력의 두 배 이상 시간과 고통스러운 노력 그리고 자기가 지금까지 배우로서 성장했다는 근거없는 자부심을 송두리채 버려야하는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기에 사실상 불가능하다.
예정시간을 10분 정도 더 초과해서 끝나자 다음 축하 공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커튼콜 도중에 나와서 차로 향하였다.
이 연극제의 관계자님의 말씀으로는 개막일 공연부터는 작품성이 아주 좋았다고는 하는데 내가 본 시작과 끝이 참 별로여서 내년도 연극제에 또 오고 싶어 질지는 잘 모르겠다. 공연 보는 내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으니까. 공연보다도 지금도 묘하게 끌리는 향기가 코에서 더 느껴질 정도이니.
정리하자면, 연극의 수준 차이는 배우들의 모든 움직임과 언어와 소리가 의미와 생명력이 있는지,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지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수준 높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연기는 관객들을 펑펑 울게도 웃게도 만든다. 관중들의 감정선이 끊어지지 않게 계속 리드해 나가는 공연을 보고 나면 시원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작년도 그렇고 올해도 그렇고 이 연극제의 공연 작품들은 아무래도 대학로나 예술의 전당에서 유료로 돈을 받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예당 무대에 올라간다는 것 자체가 엄격한 심사를 통과했다는 것이고 대학로에서 장기공연하는 작품들도 대중의 인정을 받은 것들이다.
다음부터는 수준 높은 유료 공연만 보는 게 나를 위해서 나을 것 같다. 시간을 소중히, 골라서 봐야지.
오후의 창/제작 워크숍부터 보느라 배가 고파져서 공연 시작 1시간 전에 근처 아파트골목 허름한 백반집에서 보리밥(6000원)을 사 먹었는데 그 가격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신선한 식재료로 맵거나 짜지 않게 만든 진짜 가정식 반찬과 나물 보리밥이 아주 훌륭하였다. 공주에 가면 다시 가고 싶은 밥집이다. 유명 관광지 식당가에 위치하면 12000원은 받아도 될 것 같은데 식당 아주머님 인상이 너무 선하고 인심 좋게 생기신 분이었다. 그렇게 맛난 밥도 안 먹고 빈 속에 연극 봤으면 향기고 뭐고 아무것도 안 들어왔을 것 같다.
역시 글로 적다 보니 생각과 경험이 명료하게 정리되면서 배움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