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예술학적 관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전혜정 교수님의 강연 내용을 정리하였다. AI의 본질적인 면을 깊게 이해할 수 있었던 명강의였다.
AI는 Tool(도구)이 아니다.
AI는 그저 도구일 뿐이라며 잘 활용하는 법을 배우면 된다라는 흔한 명제가 지지받지만 이는 위험하고 안일한 착각이다. 전통적 의미에서 도구는 인간 의도를 정밀하게 수행하는, 내 생각을 실현하는 '내 몸'의 확장으로 인간의 몸에게 허락된 물리적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것이다.
도구는 인간 신체의 확장을 목표로 한다.
내 다리보다 더 멀리, 더 빨리, 더 높이
내 손보다 더 높이, 더 많이, 더 강하게
내 눈보다 더 멀리, 자세히, 또렷하게
따라서 이상적 도구의 궁극적 목표는 사용자의 의도와 결과물 사이의 '미끄러짐'이 0에 수렴하는 것이다.
AI가 전통적 도구와 다른 점
AI는 인간의 의도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를 침범하고, 의도를 교정하고, 의도를 만든다. AI의 생성은 기본적으로 확률을 통한 소통, 불확실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 자체. 즉 인간의 의도와의 끊임없는 '미끄러짐(Slippage)' 그 자체이다. 이 낯선 존재는 '내 말을 끊임없이 오해하는 타자'이자,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외계인'과 다름없다. 즉 AI는 그야말로 도구가 아닌, 유사-타자이다. 따라서 AI와의 관계는 일방적 '사용'이 아닌, 예측 불가능성을 감내하고 조율하는 경영에 가깝다.
만약 인간이 확률함수와 소통하며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외계인과 일하는 방식일 것이다.
인간의 의도와 AI 결과물 사이엔 언제나 끊임없는 '미세한 왜곡장'이 존재한다. 이 왜곡을 감내하고 방향을 다시 잡아나가는 과정이야말로 현재 AI 작업의 핵심이다. AI의 엉뚱한 결과물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 맺기를 요구하는 신호로 이해해야 한다.
AI 혁명도 과거의 인지 혁명들의 연장선에 불과한가?
현재 인류는 뗀석기 시대의 인류가 해내던 능력의 대부분을 잃었고, 구술로 긴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도 없어지면서 암기 능력도 잃었다. 키보드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글의 구조를 먼저 건축하고 문단과 문장을 한 번에 완성하는 능력도 잃었다. 이렇듯, 인류의 인지구조는 오랜 역사 속에서 여러 번 파괴되었다. 그러면서 어떤 능력은 영원히 잃었고, 다른 방향으로 재구축되었다.
AI는 뇌의 생각하는 근육을 퇴화시키고 있다.
인지 능력의 퇴화
기술 발전이 특정 인지 능력의 퇴화를 동반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반복된 현상이다. 그러나 구술 문화가 문자에 자리를 내주며 암기력이 퇴화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AI는 문자 혁명 이상의 인지 구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가장 큰 우려는 문제 해결 과정을 AI에 의존하며 뇌의 '생각하는 근육'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누가 '사다리'를 걷어차는가?
시니어와 주니어의 양극화
이 속도와 규모의 결합이 낳는 가장 큰 영향이 바로, '사다리 걷어차기 기술'이라는 현상이다. 이미 높은 수준의 최상위 전문가는 AI를 '에스컬레이터'로 활용해 생산성을 극대화한다. 이들은 AI에게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결과를 비평하는 'SSS급 기획자'가 될 것이다. AI는 전문가(시니어)에게 더 유리한 기술이 될 것이다.
성장 기회의 박탈
반면 주니어와 중간급 실무자들은 그들의 훈련장이었던 '업무 과정' 자체를 AI에게 박탈당하게 된다. 수많은 B컷 제작, 서툰 기획안 피드백 등 필수적이던 경험적 사다리의 소실. 결국 이들은 AI 결과물을 기계적으로 다듬는 '오퍼레이터'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실무를 놓고 있던 중간 관리자들의 고용 숫자도 줄어들 것이다.
개인의 퇴화가 아닌 인류 종의 퇴화 위기
이는 단순한 일자리 문제를 넘어, 한 세대의 직업적 성장 기회를 박탈하고 사회 전체의 '생각하는 근육'을 약화시키는 위기이다. 뇌는 고통스러운 훈련을 통해 성장하는 데, 이 과정을 AI에 통째로 넘기는 '인지적 오프로딩'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과거의 기술 혁명과 AI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험한 차이점이다.
교육이 생각해야 할 지점
AI 활용으로 더 많은 일, 더 창의적인 일, 생각지도 못했던 기획들을 해날 수 있다. 그러려면 전제 조건이 어느 정도 안목과 기본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 기본기를 갖추기 위해서는 다소 무식하고 고통스러운 반복 훈련, 암기 훈련 등이 필요하다.
적극적으로 AI활용부터 가르쳐도 된다는 분들은 대학교 1, 2 학년들이 어느 정도로 상상력이 없는지, 기본기와 안목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훈련 시간이 드는지를 상상조차 못 하고 있다. AI 전문가들은 이미 전문가이기 때문에 자신이 쉽게 발상하는 것을 남들도 한다고 오해하고 있다.
흔한 편견과는 달리, 대학생이고 어려서 창의적이기는커녕, 대체로 보고 경험한 것이 적어서 더 경직되어 있는 이가 태반이다.
'이 정도면 됐다'며 쉽게 만족하는 낮은 안목으로 선택된 글과 그림이 범람할 때, 기본기와 안목을 갖춘 진짜 전문가가 AI를 활용한다면 그 차이는 이전보다 더 벌어질 것이다. '누구나 화가가 된다?(X), '이제는 더욱 초격차의 시대(O).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주고 날아다니게 만드는 엘리트 육성도 중요하지만, 교육의 목표에는 그것만 있지 않다. 백마디해도 한 마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날개가 아니라, 다른 목표를 줘야 하는 것이고, 최소한의 소통과 밥벌이, 자율 사고가 가능한 교양 시민을 만들어내는 일을 교육기관이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가장 필요한 능력, 통섭 교육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창의적 능력: '통섭'
통섭은 어떻게 생기는가? 온갖 분야를 구르고 헤엄치고 틈새를 건너 다니고, 무식하게 비효율을 체감하고 구조를 겪고 익혀야 생기는 능력이다. 통섭의 능력이 곧 창의적인 기획과, 디렉션, 솔류션 능력을 발전시킨다. AI를 통해 온갖 분야를 거짓으로 경험한다고 해서 통섭의 능력이 함양되는가? AI는 '안다는 착각'만 준다. AI의 도움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신이 쓴 글도 더 잘 잊어버린다는 논문 결과도 있다.
AI 아트를 예를 들자면, 미술사와 미술 기법, 카메라와 연출, 스토리텔링을 하나라도 더 다양하게 접하고 익힌 사람이 더 다양한 발상으로 더 다양한 그림을 더 오랫동안 만들어내고 AI 멱살을 잡아당겨 이것저것 시키며 함께 공진화를 할 수 있다.
"AI 시대엔 누구나 좋은 그림을 그리고 좋은 글을 쓴다"라는 슬로건이 아무 의미가 없는 이유.
이젠 누구나 스마트폰이 있으니 촬영 편집이 안 힘들어졌고, 그래서 누구나 독립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데 왜 모든 사람들이 다 영화감독이 되지 않는 것인가? 교육은 빠른 결과물을 내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내를 들여 반복하는 과정들을 통해 한 명의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AI, '다이소 미감'과 인간 편향의 거울
다이소 미감
게다가 AI가 만드는 아트는 독창적 예술이라기보다 데이터 기반의 '통계적 미감'에 가깝다. 이는 다이소적인 예술로, 대중을 평균적으로 잘 충족시키는 예술이다. 대중의 보편적 필요와 취향을 잘 분석해서 잘 큐레이션 한 곳이 다이소다. 다이소 안에서 아무리 취향과 개성을 가지고 선택해 봐야, 다이소가 구축해 놓은 어떤 평균 미감 세계관 속에서의 선택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AI는 가장 안전하고 인기 있는 미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AI 미감의 안전한 한계
AI에게 '못 그린 그림'을 그리라고 할 때 이런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기어코 '고수가 일부러 못 그린 듯 하지만 그런 양식에서 추구하는 어떤 미감이 있는 상태'로 보정해 버린다. AI에게는 인간이 '아름답다'라고 여기는 보편적 미감으로 회귀하려는 강력한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때로 기존의 미적 기준을 깨부수는 전복적 시도라면, AI는 그럴 만한 '패기'가 부족하다.
AI 아트는 '설명되어 본 적 없는' 예술을 하기 어렵다
학습 자체를 언어를 통해서 하기 때문이다. (학습된) 언어의 한계가 곧 (AI) 세계의 한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에 도달하는 우리의 방식이 언어에 의해 제한된다'라고 말했고 AI는 실제로 '언어로 태그 되지 않은 세계'를 갖지 못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편향을 비추는 거울
뒤집어 생각하면, 이 지점에서 AI는 인간 사회의 편향을 비추는 정직한 '거울'이 된다. 예를 들어 '자유'를 요청할 때, 인간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다양한 상징을 떠올린다. 하지만 AI에게 '자유'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그 단어와 가장 많이 연결된 이미지들의 통계적 집합이다. 그 결과, AI는 '자유의 여신상' 같은 지극히 미국적인 맥락의 이미지를 내놓을 확률이 높다. 이는 모델을 훈련시킨 기업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도 무관하지 않다.
편향의 폭로
내가 '보편'이라 무의식적으로 가정했던 개념이, 데이터 속에서는 특정 문화에 '편향'되어 있었음이 폭로되는 순간. 결국 우리는 AI를 통해 우리 세계의 편향을 선명하게 마주하게 된다.
저항으로서의 예술, 혹은 안락한 종속
인간 고유의 창의성이란 말은 밈일 뿐
AI 시대, 인간 예술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인간 고유의 창의성이라는, 실체도 없고 공허한 밈적 구호를 찾아 안주하는 낭만적인 결론은 기만이다. AI가 생성하는 평균적 콘텐츠에 대중의 취향이 길들여지는 '미감의 하향 평준화'라는 악순환을 경계해야 한다. 이 안락한 종속의 길 앞에서, 진정한 인간 예술가의 역할은 '저항'이 될 수밖에 없다.
저항으로써의 예술
여기서 '저항'이란 기술 자체를 거부하는 러다이트 운동이 아니다. AI의 효율성 논리에 맞서, 비효율적이더라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치를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지켜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왜 인간은 그런 걸 하는가? "하고 싶기 때문".
경이를 모르는 존재
AI는 '경이'를 느끼고 근본적인 '왜 내가 이 작업을 해야 하는가? 왜 하고 싶은가? 를 묻는 능력이 없다. AI는 세상을 보고 문득 이치를 깨닫고 놀라는 일도 없고, 자신이 창조해 낸 것으로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경이와 숭고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AI는 몸을 가진 인간이 죽음이라는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갖게 되는 '미지에 대한 호기심' '유한한 삶에서 오는 불안' '예술로써 부조리를 극복하고 싶은 감각' 등 예술 충동을 보이지 않는다.
지능에 대한 이해; 몸을 지닌 지능
사람들은 '지능'을 단 하나의 형태(동물 지능)만 있다고 오해한다. 동물 지능은 자연선택과 신체적 조건 속에서, 즉 다음과 같은 압력을 통해 형성되었다.
육체를 가진 자아: 끊임없는 의식 흐름, 항상성 유지, 자기 보존
자연선택: 생존 번식 권력 지배에 대한 강한 충동
감정 패키지 내장: 공포, 분노, 혐오 등 생존 휴리스틱
사회적 진화: 타인의 마음을 추론하는 능력(마음 이론), 감정 지능, 동맹, 적대, 유대 형성 등 복잡한 사회 계산
탐색-활용 균형: 호기심, 재미, 놀이, 탐험, 세계 모델 학습
즉, 동물 지능은 다중 작업, 적대적 환경, 실패 시 곧 죽음이라는 강력한 압력에 의해 범용적이고 강건한 형태로 진화되었다. 다시 말해, 물리적 한계를 갖는 '몸'으로 형성되었다.
몸을 통과하는 예술
인간의 예술이란 창의성 어쩌고가 아닌, 자신의 몸에 쌓인 경험과, 예술 작업을 신체로 해내는 것에서 의미와 가치가 발생하는 신체적이고 신체 체험적이고 수행적인 예술이다. 단 하나의, 교체할 수 없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몸으로 겪어낸 '고유한 삶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예술이다.
미래의 인간 작가는 AI와 기술적 완성도를 겨루는 기술자가 아니다. 그는 AI라는 거대 파도 앞에서 안락한 종속과 시대에 대한 저항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철학자'이자 저항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불확정성, 그 자체가 예술이 될 때
새로운 가능성, 불확정성
AI 예술의 더 깊은 차원은 '더 나은 결과물'을 얻는 것을 넘어 AI의 본질인 '확률적 불확정성' 자체를 예술의 재료로 삼는다면 어떨까? AI의 명백한 한계인 '통계적 미감'으로 한 작품을 완성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같은 프롬프트로 매번 다른 작품이 나오는 '불확정성' 자체를 작업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개념이라면?
이는 기계의 오해를 창의적으로 해석하는 수준을 넘어, 기계의 작동 방식 자체를 예술의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시도가 될 수 있다.
가장 슬픈 의자의 클리셰 필드
예를 들어, '가장 슬픈 의자'라는 동일 프롬프트를 AI에게 천 번 입력한다고 가정하면, 그로부터 생성된, 제각기 다른 천 개의 이미지를 모두 모아 하나의 작품으로 전시하는 것. 이 프로젝트는 '슬픔'이라는 하나의 개념이 AI의 통계적 상상력 속에서 얼마나 다채롭게, 또는 뻔한 클리셰로 분기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통계적 미감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개념이 될 수도 있다.
가능성의 다중우주
AI에서는 예술 작품이란 가장 잘 나온 한 점이 아니라, '가능성의 다발' 그 자체가 된다. 관객은 완성된 결과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이 구현되는 무한한 스펙트럼, 즉 '다중우주'를 탐험하게 된다. 이는 하나의 '완성된 오브제'만을 중시했던 전통적 예술 개념이 해체되는 지점이다.
이런 무한한 미끄러짐을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기호적인 성격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개념의 장(field)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AI와의 작업은 실패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또한 작품을 하나의 독립된 아우라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복잡한 위상에서 통계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양자적인 성격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AI 예술가가 하는 역할
Duchamp이 '개념과 선택'을 예술 제도로 들여올 수 있음을 보여줬듯이, AI 시대의 예술 행위도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단순히 AI로 누가 더 예쁜 그림, 어려운 그림, 사람처럼 그린 그림, 실사와 똑같은 이미지를 그리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AI 시대의 예술이란, 정답 찾기가 아닌 '가능성의 다중우주를 설계하고 탐험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AI로 작업할 때, 인간의 역할은 '제작자'가 아닌, 가능성의 시스템을 설계하는 '설계자이자 큐레이터'로 근본적으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