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래치(scratch)
함바집은 건설 현장 등에서 노동자들에게 저렴하고 푸짐하게 식사를 제공하는 현장 식당을 뜻하며, 일본어 '飯場(はんば, 함바)'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는 노동자 숙소나 식당을 의미했지만, 현재는 주로 한식 뷔페 형태의 식당을 지칭하며 가성비 좋은 백반집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 구글 AI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함바식당이 생겼다. 집 옆에 새로운 아파트 건설이 시작되어서 생겼나 물어봤는데 그걸 미리 알고 오픈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조식과 중식만 하고 8800원이라고 적혀있는데 세 번째 갔을 때 현금을 내니 8000원만 받았다. 이처럼 카드가와 현금가가 명시적으로 다른 곳은 처음이다. 공사장 인부들도 꽤 오고 주변의 주민들도 와서 식사를 한다.
회사 구내식당에 얼굴을 비추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나는 점심때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집에 와서 먹거나 집 주변 다른 회사 구내식당을 이용하곤 한다. 직원이 아닌 일반인 가격은 오백 원 추가해서 7천 원인데 좋은 재료를 쓰지만 자주 먹다 보면 아무래도 질린다. 그러던 차에 새로 생긴 함바집에 가보니 먹거리도 다양하고 푸짐하다. 하지만 여기도 세 번 정도 맛보니 역시 식재료의 퀄리티가 구내식당보다 떨어진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렇지 않으면 수지타산이 안 맞을 테니까.
얼마 전 밤늦게 멀리 산책을 하다가 대단지 오피스텔 2층에 있는 한식뷔페(4.3/5.0)를 보았고, 검색해 보니 9000원이었다. 어제는 지도에서 한식뷔페로 검색해 보니 꽤 많이 보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평점이 높은 새로운 곳(4.8/5.0)을 호기심에 찾아가 보게 되었다. 여기도 카드가 8800, 현금가 8000원으로 집 근처와 동일한 가격이었다. 근데 리뷰에 적혀있는 호평들과는 달리 기대한 것보다 훨씬 별로였다. 오히려 집 근처가 가짓수로나 질적으로나 더 나은.
여기도 공사장 인부들이 많이 보였다. 다 먹고 계단으로 내려가다가 계단참 창가 철제 난간 위에 공사장 안전모가 빼곡하게 줄지어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뒤집어진 안전모를 보기는 처음인데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공사 현장의 고단함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다들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빠겠지.
푸짐하게 먹긴 하였지만 잘 먹었다는 생각은 안 드는 부족함이 있어서 강연 후 설문조사 등으로 받은 몇 개의 스타벅스 쿠폰 중 아아 쿠폰 하나를 사용해서 추가금을 내고 에그베이컨 샌드위치를 먹었다. 스벅 직원이 처음에 아아와 샌드위치를 계산하려고 했지만 내가 작년 이맘때 결심한 게 커피는 다시는 안 사 마시기로 하였기에 커피 대신 정수기 물을 마셨다. 하지만 샌드위치가 후식으로는 적절하지 않아서 집에 가서 단감로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함바집에서 당연한 현금 지불과는 다르게 스벅에서는 현금으로 추가금을 내려고 했더니 직원이 카드만 된다고 말해서 깜짝 놀랐다. 계좌 추적 안 당하려고 현금 사용을 선호하는데 갈수록 어려워진다.
1월 2일에 회사에서 점심때 전 직원에게 떡국을 무료로 준다고 한다. 팀장 사무실이 같은 2층 바로 두 칸 옆에 있지만 12월에 복도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기에 오랜만에 얼굴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식비도 아낄 겸' 그날 점심때 구내식당에서 같이 먹자고 오전에 연락해 봐야겠다.
한편 사무실 문에 작게나마 세로로 된 반투명 유리가 있어서 실내등이 켜있는지 꺼져있는지 보이는 게 은근히 신경 쓰였는데, 3층에 올라가 보니 새로 리모델링된 사무실들 몇 개는 유리가 아예 없어서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도 있었고 그 팀의 팀장만 반투명 유리문이었다. 그런데 잘 보니 내부 조명여부가 안 보이게 불투명한 벽지 같은 것으로 막아놓은 것이었다. 그걸 보고 나도 용기를 내서 내 사무실 문유리에 두꺼운 박스 지를 잘라 붙이고 그 위에 모네 수련 그림 포스터로 이중으로 덮어씌웠다.
다 퇴근하고 복도 등도 꺼진 늦은 밤에는 문 아래로 희미하게 빛이 새나가지만 복도등이 켜있는 동안에는 내 사무실이 불 켜있는지 아닌지 전혀 안 보인다. 누가 지나가다가 내 존재를 파악하려는 듯한 시선이 은근히 신경 쓰였는데 이젠 신경 안 쓰게 되어 좋다. 보직자 사무실처럼 사람들이 자주 들락거릴 이유도 없으니 문제없다. 바로 옆에 새로 생긴 증축동도 가봤는데 거긴 전부 유리창 없는 문이더라. 그러니 내 사무실만 가림막 치우라고 누가 말할 수도 없는 거다. 오후에 졸려서 조명 끄고 눈가리개 하고 의자 제치고 한 시간쯤 잤는데 밖으로 티가 안 나니 맘도 편했다.
어느 작가와 소통을 하다가 문득 2년 전에 읽었던 <세이노의 가르침> 이 떠올라서 밀리의 서재에서 이북으로 다운로드하여 다시 보고 있다.
개정판 1부 첫 장을 펼치면 다음과 같이 섬뜩한 문단이 보인다.
"내가 말한다. 경제적으로 실패하였다면 저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 체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그 체면에 흠집을 내라 scratch. 출발점을 저 낮은 곳에 다시 그어라 scratch. 당신이 놓치려고 하지 않는 생활수준이라는 것을 지워 버리고 scratch 새로운 출발점 scratch에서, 무에서 from scratch, 근근이 살아가면서 scratch along 돈을 모아라 scratch up. 그러면 돈 scratch이 쌓이게 된다. 이것이 실패로부터 탈출하는 비결이다. 스크래치 하라!"
내가 함바집 층계참 난간의 뒤집어진 공사장 안전모들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던 것은 바로 '스크래치'였다. 위 문단에서 세이노가 말한 대로 저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체면과 겉치레에 흠집을 내야 한다는 것을, 내 생활 수준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무에서 근근하게 살면서 돈을 모으고 눈덩이처럼 불리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였다.
다시 실패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급여노동자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생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지출은 하지 않겠다. 고금리 적금도, 고수익 투자도, 시작은 뼛속 깊이 '스크래치'를 굵게 새기고 자동 실행 모드로 만든 다음에 할 일이다. 안그러면 밑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