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싸 Oct 21. 2021

정전의 경이와 불편

'모리스디페렌테'(다른삶) 12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우기에는 날씨가 정말 변화무쌍하다. 비가 무섭게 오다가 금방 개였다가, 또 비가 쏟아졌다, 흐렸다가… 비가 많이 오면 자꾸 정전이 된다. 전선 연결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떨 때는 지역 전체적으로 정전이 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일부 구역만 정전이 되기도 한다. 길에서 본 전신주들이 한국 대비, 낡고 가느다란 것으로 보아 일부가 비와 강풍에 쓰러지는 일도 많을 테고, 전선 연결이 중간중간 끊겨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밤에 동네 일대가 다 정전이 되면, 정말 무척 까매진다. 내가 사는 곳이 로스팔로스 중심가라지만, 울창한 열대의 나무들 군데군데 사이에 집들이 들어서 있는 모양새다. 이런 곳에서 전기가 나가면 무섭도록 까맣고, 조용해져 뭔가 숙연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시각은 차단되어도, 빗소리와 비 냄새가 더 강력하게 몰려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베란다에 고양이와 같이 앉아 그 느낌들을 흠뻑 마시면서 앉아 있으면, 그냥 내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 것만 같은 느낌도 든다.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계속 눈을 깜박깜박거려도, 계속 똑같이 까맣기만 한 굉장한 어둠은 꽤나 압도적이다. 엄청 센 바람이 큰 나무들에 스치는 소리는 꼭 큰 파도가 치는 바닷가 옆에 있는 것 같다. 파도소리처럼 들리는 바람과, 비 온 뒤의 날카로운 초록빛 냄새가 섞이고, 까만 어둠이 눈에 꽉 차고, 가전제품 소리조차 하나도 들리지 않아 조용하기만 하다. 베란다에 서서 이 모든 것을 느끼고 있으면 경이롭다. 무척 원시적이고 뭔가 신화에나 나올 법한  “어둠의 원형”을 내 눈 앞에 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내 존재가 굉장히 고립되어 있고 작은 느낌도 든다.


달이 밝을 때의 정전은 또 좀 다르다. 

베란다에 가만히 앉아 인공의 불빛 하나 없이, 달빛만 비치는 밖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운치가 있다. 전기가 나가니 이웃에서 트는 시끄러운 TV나 스피커 소리도 안 난다. 풀벌레 소리가 은은히 울리고, 멀리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흔들리고 있는 야자수 나무가 반짝거린다. 우리 집 베란다 앞, 자몽나무 꽃냄새는 더 진하게 난다. 향을 눈치채기 전까진 꽃이 피는지도 몰랐는데, 철이 되니깐 향이 엄청 퍼진다. 독한 향수처럼 불쾌하게 진한 향이 아니고, 아카시아 냄새에 약간 풀향기가 섞인 듯한 향이 공기 중에 계속 머문다. 와인 반 잔 따라, 야옹이 무릎에 앉히고, 까맣고 조용한 밤, 달빛에 자몽나무 꽃향기 속에 앉아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정전이 되면 당장 생활이 불편해진다. 

사무실에선 최소 컴퓨터와 프린터기를 써야 하므로 가솔린 발전기를 돌리게 되는데, 그 소리가 온몸을 흔들 정도로 엄청 시끄럽다. 쓰지 않는 안쪽 화장실에 넣어 놓고 문을 닫고, 사무실 문까지 닫으면 그나마 낫긴 하는데 시끄럽기는 매한가지. 

집에선 다른 건 괜찮은데 냉장고가 문제다. 애초에 냉장고가 없었더라면 그걸 감안해서 식품을 사고 소비할 텐데, 냉장고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에 맞게 음식을 사게 된다. 냉동 해물, 냉장 저장하는 소시지나 치즈, 우유 등은 물론, 먹다 남은 음식도 자연스럽게 넣어 놓게 되고 말이다. 한 번 정전이 되면 냉장고의 음식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이래저래 편리한 도구들은, 항상 그것이 원활하게 작동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전제가 흔들리게 되면 “없을 때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는” 불편함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편리한 도구들을 쓰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라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서처럼 일상적으로 전기가 나가고, 물이 안 나오고, 길이 없고 등등의 상황을 겪다 보면, 우리가 편리하다고 여기는 것들, 신기술로 무장된 최첨단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예상외로 허술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전 20화 '빈' 시간의 바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