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 세계의 아이들 04
주로 아이들과 놀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을 조금씩 이어 붙였습니다. 그러다 보면 희한하게, 주위 사람들에게 들은 소소한 이야깃거리나, 뉴스에서 보는 현실의 이야깃거리들도 같이 달라붙었습니다. 이야기들이 점점 더 머릿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소위 '저 세상' 존재들은 왜 우리 옆에 있으려고 하는 걸까?'와 같은 단순한 질문에서 가지치기를 한 머릿속 상상은 자꾸 커져서, 나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두리뭉실 덩어리였는데, 자꾸 이런저런 모양새가 만들어지고, 그 모양새들끼리 이야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모험도 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한 번 써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첫째가 8년 후쯤에는 읽을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꼬리표를 붙이자면 '아동 판타지 소설'이 되겠지만, 엄마인 어른의 입장에서 던져보고 싶은 현실의 문제들, 어른의 문제들도 같이 들어 있습니다.
“왜요? 생기를 저장하고 운반하게 되면, 지금 아마님이 하신 것처럼 다들 편하게 흡수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무슨 문제요?”
“살아있는 몸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와 똑같지. 누가 채집해서, 저장하고, 운반할 것인가? 모두가? 아니야, 그럴 수 없지. 연구자들이 계속 고민해서 고안한 특수한 장비가 있어야 하고, 사용 방법도 알아야 하지. 모두가 할 수 없는 일이야. 게다가 모두가 한다고 한들, 이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지. 모두가 장비를 들고 달려들어 서로 생기를 채집하겠다고 하면, 똑같은 싸움이 되풀이되지 않겠니?”
“아... 과연, 그렇군요.”
“그래서 다시 또 기나긴 시행착오의 시기가 시작되었단다. 누가 생기를 채집할 것이며, 서로 충돌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롭게 채집을 할 것인가? 모아진 생기는 어떻게 공정하게 나눌 것인가? 열띤 토론과 때때로의 싸움과 다시 토론, 또다시 충돌이 이어졌지. 초기부터 재빠르게 생기 채집 장비를 고안한 자들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단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편한 대로 쓰겠다는 자들이 당연히 많았지. 하지만 일부는 또 그렇지 않았어. 처음부터 어떻게 하면 생기를 좀 더 합리적으로 채집하고 나누는가 하는 데 관심이 있는 자들도 있었거든. 타협점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
생기 채집 장비를 고안한 자들은 모아진 생기를 팔고자 했어. 생기는 모아두어도 별로 소용이 없었거든. 채집되고 저장된 생기는 일종의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단다. 꼭 음식처럼 말이야. 사람의 몸으로부터 나온 따스하고 살아있는 에너지를 잡아두어 보관하고 운반하는 것 까지는 성공했지만, 보존은 별개의 문제였던 거야. 3일 정도가 지나면 저장용기에 든 생기는 벌써 어두워지고 차가워지기 시작하지. 일주일이 지나면 그냥 시커멓고 뿌옇게 변했다가 사라져 버린단다. 생기의 보존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별 진전이 없단다.
생기에는 유통기한이 있고, 우리가 각자 충전하고 흡수할 수 있는 생기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생기를 많이 채집한들 혼자서만 마구잡이로 들이마실 수는 없어. 내가 100을 모은다고 해도, 100을 한꺼번에 들이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각자 한 번에 들이마실 수 있는 생기의 양은 정해져 있단다. 그 양은 개인별로 다들 조금씩 다르지. 그 양을 넘어서면 들이마실 수 없어. 남은 것은 놓아두었다가, 다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 마실 수 있지만, 이미 3일이 지나면 그 기운이 떨어지고 변하기 시작하지. 이렇기 때문에 생기 채집자들은 여분의 생기를 팔기로 한 거야.”
“여기도 돈이 있어요?”
“그럼.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과는 좀 다르지만, 여기도 돈이 있지. 하지만 일종의 물물교환 역시 많이 이루어진단다. 여기선 각자 무언가를 만들고 생산해야만 해. 그게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전 약속이자 생존 조건이지. 채소나 꽃, 과일을 기르고, 소나 염소, 닭을 기르고, 알을 모으고 우유를 짜고, 보석을 캐도 되고... 아니면 케이크나 쿠키를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어도 되고. 음악을 연주하거나, 작곡을 해도 되고, 조각을 하거나, 이야기를 만들어도 되지. 종류는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잘 만들어야만 한다는 법도 없단다.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을 각자 만들면 돼. 누구나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만들지.”
“그런데... 그렇게 다 기르고 만들어도 어떻게 먹어요? 몸이 없어서 먹을 수도 없고, 먹을 필요도 없다고 하셨잖아요. 생기만 섭취하면 된다고...”
“맞아. 하지만 생기도 맛과 향이 천차만별이란다. 아기들의 생기는 정말 부드럽고, 따뜻하고, 아주 깊숙한 곳부터 차오르는 느낌이 있단다. 여기 있는 모두가 가장 좋아하는 생기일 거야. 아기들 정도는 아니지만,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울고 하는 데서 오는 생기도 아주 고급이야. 모두가 좋아하지만, 한정되어 있으니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지. 음식과 비슷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영양 아니면 필수 요소, 즉 너에겐 음식이 될 테고, 우리에겐 생기가 되겠지. 이 정도는 누구나가 구할 수 있단다. 하지만 누구나 더 좋고 맛있고 즐거움을 주는 생기를 맛보고 싶어 하지.”
“수요와 공급 이야기죠? 저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어요.”
“그래, 맞아. 많은 사람이 원하는데 비해, 수는 제한되어 있으면 가격이 올라간단다. 또 한편으론... 같은 생기를 충전한다고 해도, 좀 더 다양하고 향기롭게 즐길 수 있는 방법도 많아. 이 세계에서 기르고 난 것들로 요리를 해서, 생기를 뿌려 흡수하는 거야. 네가 본 것처럼 말이야. 요리를 직접 맛볼 수는 없지만, 재료와 음식의 향과 맛은 느낄 수 있단다. 오히려 몸의 감각으로 맛볼 때보다 향과 맛을 더 예민하고 강하게 느끼는 편이지. 그래서 재료의 질이나 향을 끌어올리고, 서로 다른 향을 조화시키고, 또 생기와 함께 맛보는 데 다들 많이 관심을 둔단다.”
“그래서 그랬구나... 아마님이 해주신 간식들, 다 너무 맛이 좋았어요.”
“하하하하, 보비야, 고맙구나. 다 재료가 좋아서 그렇단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돈을 내도 되고, 자기가 기른 것들을 줘도 되거든. 우유나 야채, 과일, 꿀은 다 우리 학생들이 준 거야.”
“아, 수업! 맞아요, 그 수업도 너무 신기했어요. 그것도 생기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렇단다. 수업 시간에도 말했지만, 그림이나 글, 음악은 모두 창작자의 에너지가 담겨있어서, 즐기는 사람들에게 그 에너지를 전달한단다. 나는 그림으로 수업을 하는데, 그림의 에너지를 좀 더 잘 느끼고, 즐기고, 공감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물론 이런 것은 우리가 섭취해야만 하는 생기를 대신할 수는 없어. 그건 살아있는 사람으로부터 직접 나와야 하는 생기거든. 하지만 창작자의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잘 느끼는 것은, 뭐랄까, 꼭 운동과 같단다. 좀 더 생기 있게 만들어 준다고 해야 하나. 똑같은 생기를 마신다고 해도, 좀 더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고, 좀 더 생생한 느낌을 가질 수 있지. 우리는 몸이 없이 기와 에너지로만 이루어진 존재이니, 몸을 움직이는 운동이 아닌, 다른 운동이 필요한 셈이지.”
“알 듯 말 듯해요. 참, 그 동물들은요? 동물들도 다 알아듣는 건가요? 그 동물들은 그러니깐, 말하는 동물들인가요?”
“하하하하하, 아니야. 하지만, 그네들이 몸을 가지고 있던 때와는 확실히 다른 존재이긴 하지. 사람처럼 사고하고 말을 하진 못하지만, 여기 있는 우리들은 동물이나 사람이나 모두 다 서로 소통을 할 수 있단다. 동물들은 우리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고, 우리는 동물들의 의사 표시나 감정 표시, 짖거나 고갯짓이나 눈짓, 발짓을 다 잘 알아들을 수 있어. 꼭 사람이었던 존재는 모두 다 훈련받은 애니멀 커뮤니케이터가 되고, 동물이었던 존재는 고도로 훈련받은 동물이 된 것처럼 말이야.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하게 된단다, 이 세계에선 말이야.”
“신기하네요.”
“흠... 그렇겠구나. 생각해보면 나도 신기했었는데, 지금은 아주 당연하게 느껴진단다, 오래 있다 보니 말이야. 하지만 너도 보면 알게 될 거야. 동물들의 표정이라든가, 몸짓이 아주 분명하단다. 그리고 보통 동물들과의 의사소통은 사람과의 대화와는 달라. 좀 더 간결하고 추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그 동물들도 생기를 섭취해야 하나요?”
“그럼 당연하지. 하지만 동물들의 생기 섭취는 아주 단순해. 그들은 몸을 가진 동물들로부터 생기를 섭취하는데, 그냥 자기네들이 필요할 때 가끔씩 다녀온단다. 더 좋은 생기라든가, 생기의 맛과 향이라든가 하는 것을 우리만큼 예민하고 다양하게 느끼지는 않아. 하지만 동물들 역시 음악이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좋아하는 경우가 많아. 너는 어떠니, 보비야? 음악이나 그림, 책 읽기를 좋아하니?”
“책 읽는 건 아주 좋아해요. 음악은 그냥 이것저것 다 들어요. 그림은 솔직히 별로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아마님이 하시는 그런 그림 수업은 계속 듣고 싶어요.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하하하하, 고맙다, 보비야. 다음에 수업할 때 또 오렴. 그때는 같이 앉아서 들어보면 어떻겠니?”
“네, 감사합니다... 저, 어제 아빠한테 이야기했어요, 귀신을 믿느냐고 여쭤봤거든요. 아, 그러니깐, 아마님이 귀신이라는 게 아니고, 뭔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뜻으로 한 얘기예요. 몸은 없는데, 몸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할 수 있고, 사람 같은데, 정말 사람은 아니고... 그래서 아빠한테 그걸 설명하느라고요.”
“하하하하하, 보비야. 괜찮단다. 사실 우리는 약간 귀신같은 면도 있다고 생각해.”
라고 눈을 찡긋하며 아마님이 말했다. 보비도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아빠는요...”
라며, 보비는 아빠와 나눈 이야기를 아마님에게 들려주었다. 아빠가 경험한 기척과 누군가 치고 가는 느낌, 그리고 에너지들이 튕겨 나오고 부딪친 것이 아닐까 하는 아빠의 생각, 어린아이들이 가진 생명력, 아빠가 생각하는 ‘사람과 다른 존재’란 영혼, 어떤 에너지의 흐름이나 폭발, 귀신이나 유령일 수도 있다는 것, 또 우리가 이름을 붙일 수 없거나, 잘 모르지만, ‘또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는 아빠의 말을 아마님에게 말했다.
아마님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보비의 말을 들었다.
“그래, 아빠가 하신 말씀이 다 맞구나. 보비 너와 네 동생이 어렸을 때니깐, 너네 집안은 정말 에너지와 생기로 가득 찼을 거야. 아기들 둘이 종일 뛰고 웃고 울고 장난을 쳤겠지. 분명히 너네 집엔 그 생기를 채집하려는 채집꾼들이 있었을 거야. 아마 너네 아빠가 그때 느낀 것은 그 넘쳐나는 에너지였을 수도 있고... 채집꾼들이 싸우는 것이었을 수도 있어. 생기 채집꾼 사이에는 나름 규칙과 각자 영역이 있는데, 어디나 그렇겠지만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꽤 많단다. 현장에서 싸우고 끝내기도 하고, 아니면 법정까지 갈 때도 있지. 현장에서 싸울 땐, 사람들이 가끔 가다가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어. 물론 직접 그걸 볼 수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야. 또 항상 그 에너지 충돌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물건이 떨어진다거나, 창문이 흔들린다거나 할 때가 있단다.”
“네...”
보비는 아마님과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시간이 꽤 오래 지난 것 같았다. 보비는 아직도 궁금한 것이 많았다. 생기 채집꾼들에 대해서도 궁금하고, 아마님 말고 다른 사람이나 동물들은 여기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또 아마님의 딸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지만, 왠지 조심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보비야, 너랑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은 참 재미있구나. 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도 된단다.”
보비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아마님은 상냥하게 말했다.
“그런데... 나도 궁금한 것들이 생겼단다. 사실 너랑 처음 만나고 와서 혼자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지만, 딱히 답을 못 찾겠구나. 네가 왜 여기에 오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거든. 우리가 네가 살고 있는 세계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아. 직접 생기를 채집할 필요가 없어진 요즘은, 다들 많이 왔다 갔다 하지 않지만 말이지. 어쨌거나 우리는 쉽게 두 세계를 오고 갈 수 있단다. 하지만 살아있는 몸을 가진 너 같은 경우는 다르지. 이 세계로 들어오는 통로를 발견하는 것은 물론, 들어오는 것도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거든.”
“아 그래요? 저는 딱히 이 세계를 찾아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없었는데요. 그러니깐 이런 세계가 있는지도 당연히 몰랐고... 공을 돌려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래, 네가 얘기했지. 아주 우연한 일이야... 하지만 그게 정말 우연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공이 계속 튕겨 나왔다고 했잖아, 그렇지?”
“네, 제가 몇 번이나 집 안으로 던졌어요. 그리고 뒤돌아가면 바로 뒤에서 공이 다시 굴러 나왔어요.”
“흠...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리고 그 자전거도... ”
과연 그렇다고 보비는 생각했다. 아마님과 만나고, 이상한 세계에 대해서 듣게 된 사실들이 너무 놀랍고 신기하다 보니, 처음에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마님과 이야기하다 보니 보비도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진짜... 그 공은 내가 오는 것을 보고 튀어나온 걸까? 아니, 누가 보고 있다가 공을 던진 걸까? 나를 이곳에 들어오게 하려고? 그런데, 누가? 왜? 나는 그 집이 있는 길로 다니지도 않는데 말이야. 그 날 처음으로 우연히 지나가던 길이었어. 혹시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게 아닐까?’
아마님과 보비는 잠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 맞다! 저 아빠랑 만나기로 했어요, 도서관에서. 이런, 늦지는 않았겠죠? 지난번에도 한참 지난 줄 알았는데, 집에 가니깐 평소보다 10분 정도밖에 늦질 않았거든요.”
“그래, 괜찮을 거야. 여기와 네가 온 곳의 시간은 좀 다르니깐. 어떤 날은 똑같이 겹치기도 한단다. 하지만 평소엔 여기의 낮 시간이 더 빨라. 밤에는 반대란다. 여기가 더 느리지. 그래서 두 세계의 하루가 똑같이 흐르는 거야. 지금은 낮이니깐 괜찮아. 저번처럼 연결문으로 해서 나가겠니? 그 편이 더 빠르지.”
“네? 무슨?... 아! 그 버섯 속에서 나온 문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우리 세계와 네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들 중의 하나란다. 우리가 오고 갈 때, 어떤 정해진 지점을 통과해서 움직이기도 하고, 두 세계를 직접 연결하는 문으로 오고 갈 수도 있어. 평소에 쓰지 않을 때는 그렇게 접어서 보관하는 거야."
"편리하네요. 마술 같았어요... 아, 그런데 오늘은 집이 아니라 도서관으로 가야 해요. 부모님께 학교 끝나고 도서관으로 바로 갈 거라고 말씀드렸거든요. 도서관에 가는 날은, 아빠랑 만나서 같이 집으로 가요. 아빠가 퇴근하고 오시거든요. 버스가 도서관 앞에 서요.”
“그렇구나...”
아마님은 아주 잠깐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방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얘, 보비야, 참 좋구나. 그렇게 아빠랑 같이 만나서 집으로 가고 말이야.”
“아, 네, 뭐... 그냥 그게 편하니깐요.”
보비는 대답했다가, 잠시 후 얼굴이 빨개졌다. 그게 뭐가 좋다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말했지만, 금방 다시 생각해 보니 아마님은 딸을 생각하면서 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 맞아. 아마님도 딸이 있다고 했으니깐... 딸이랑 같이 그렇게 다니고 싶은가 봐. 딸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데...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물어봐야 되겠어. 아마님이 막 울면 어떻게 하지?’
보비가 생각하는 사이, 아마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보비야. 그럼 그 도서관 근처에는 수풀이나 나무나, 골목길이나 사람이 잘 없는 한적한 곳이 있니?”
“음... 아니요. 바로 앞은 도로고, 뒤는 아파트예요. 나무가 있긴 하지만, 다 작은 나무들이에요. 또 들어가면 바로 주차장과 마당이 있어서, 탁 트인 곳이에요.”
“그렇구나... 그럼 안 되겠는걸. 그럼 오늘은 네가 들어왔던 그 집을 통해 나가야 되겠다.”
라고 말하며, 아마님은 문을 열고 정원 쪽으로 나갔다.
“접는 문으로 해서 나가면 바로 그 집 앞으로 나갈 수... 이런, 이런. 접는 문이 필요가 없겠는데.”
아마님을 따라나선 보비는 자전거를 보고 놀랐다.
“아, 아까 저를 내려주고 사라졌는데... 다시 온 건 가봐요.”
아마님은 잠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전거와 보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상해... 아무래도 보비 네가 여기 온 게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흠... 요즘 저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혹시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좀 들기 시작하네.”
“저 집이요? 왜요? 무슨 일이 있나요?”
“음, 요즘 들어 좀 이상한 일들이 있었거든. 우리는 저 집, 그러니깐 역에 들어갈 일이 잘 없단다. 다른 구역으로 이동할 때 아니고는 역을 이용할 일이 없으니깐, 들어갈 일이 잘 없지. 그런데... 아이고, 보비야, 이 이야기를 하면 또 한참 걸리겠구나.”
라며 아마님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게요... 어, 저...”
“보비야, 언제든지 찾아오렴. 너는 좋은 아이야. 그리고 너랑 이야기하는 것도 난 참 좋단다.”
아마님은 보비가 다시 놀러 와도 되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무척 상냥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보비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맙다는 말을 작게 한 후, 자전거에 올라탔다.
“어, 그럼 다음 주에 봬요. 주말엔 계속 아빠 엄마랑 같이 있어서, 나오기가 어려울 수도 있어서요. 어... 얘가 막 움직이네. 아마님, 쿠키 무척 맛있었어요. 잘 먹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 뒤를 돌아다보며 보비는 아마님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전거는 순식간에 풀밭을 달리고 언덕을 넘어 집 앞에 도착했다. 속도는 무척 빨랐지만, 아주 부드럽게 움직여서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보비는 자전거에서 내려와 살짝 자전거 핸들을 어루만졌다.
“어... 다시 고마워, 데려다줘서. 넌 정말 부드럽게 잘 달린다. 음... 또 만나.”
살짝 어색하게 이야기를 한 후, 보비가 돌아서려고 할 때, 자전거는 다시 통통거리더니 방향을 바꿔 달려가기 시작했다. 보비는 씩 웃고, 수풀 쪽으로 나와 울타리 틈을 빠져나왔다. 익숙한 골목길로 나온 보비는 곧장 도서관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으면 약 20분 정도 걸리는 도서관이니,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보비는 다소 숨을 헐떡이면서 도서관에 들어섰다.
보비가 도서관에 들어서 이런저런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곧 도서관 문을 닫겠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책도 더 눈에 들어오지 않고, 괜히 답답한 생각이 든 보비는 냉큼 도서관을 나섰다.
‘그냥 버스정류장에 가서 아빠를 기다려야 되겠어.’
라고 생각한 보비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도서관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놀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처럼 그냥 지나치려던 보비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들이 왁자지껄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보비는 잠시 멈칫하다가 놀이터로 향했다. 놀이터 구석에 있는 벤치에 털썩 앉은 보비는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총 5명으로 4~5살 정도 되어 보였다. 반대쪽 벤치에는 아이들의 엄마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3명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들은 안중에도 없이,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 그네와 미끄럼틀을 왔다 갔다 하면서 뭐라고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깔깔 웃으면서 놀기에 정신이 없었다.
‘정말 시끄럽구나. 정신이 하나도 없어’라고 보비는 생각했다.
‘저런 애들이 생기를 마구 내뿜는단 말이지. 하긴 저런 상태면 뭘 내뿜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야. 정말이지, 좀 약간 시끄러운 강아지들 같아. 보미는 저 애들에 비하면 정말 조용한걸. 하긴 보미는 쟤네들에 비하면 큰 아이니깐. 아빠 말로는 우리들도 저렇게 시끄럽다고, 아니 에너지를 내뿜었다고 했는데, 설마 우리도 저랬을까.
하여간 아마님의 말대로라면, 지금 여기 근처 어딘가에 생기 채집꾼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거네. 어디쯤 있는 걸까? 하긴 있다고 해도, 내가 볼 수 있을까? 아마님은 내 눈에 보였고, 다른 사람이나 동물들도 내 눈에 보였지만, 그건 내가 그쪽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이겠지? 여기서 아마님을 만나게 되면, 아마님이 보일까? 아마님은 그쪽 세계에선 비교적 자유롭게 이쪽으로 올 수 있다고 하셨어. 그런데 난 한 번도 그런 이상한 사람들은 본 적이 없거든. 생기 채집꾼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떻게 생기를 모으는 걸까? 진공청소기 같은 걸 들고 다닐까?’
라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보비는 다시 한번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놀고 있는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엄마들 외엔 전혀 다른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보비는 “보비야, 보비야!”하고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일어나서 버스 정류장 쪽을 보니, 아빠가 손을 흔들며 보비를 부르고 있었다. 보비는 아빠 쪽으로 뛰어갔다.
“어, 아빠. 다녀오셨어요?”
“어, 여기 나와 있었구나. 버스에서 내리니깐 놀이터에 네가 앉아 있는 게 보여서 불렀단다.”
“응, 도서관 문 닫기 바로 전에 나왔어요. 좀 답답해서요.”
“그래, 자, 집에 가자.”
보비와 아빠는 같이 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책 봤니?”
“그냥, 뭐. 이것저것요.”
평소엔 보비는 읽은 책들에 대해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책을 읽지도 않았을뿐더러, 아마님과 나눈 대화에 대해 생각하느라 머리가 꽉 차 있어서, 자기도 모르는 새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빠는 얼른 고개를 돌려 보비를 쳐다보았지만, 보비는 생각에 잠겨 있느라 아빠의 그런 시선을 느끼지도 못했다.
“얘, 보비야, 오늘은 무슨 맛을 사 갈까?”
“음... 딸기랑 쿠앤크랑, 또... 가서 봐요.”
보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신나게 대답했다. 아빠와 같이 도서관에서 걸어오는 길엔, 일주일 한 번씩은 꼭, 으레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르곤 했다. 가족이 다 같이 먹을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게 일상이었다. 보통은 보비가 다 고르고, 아빠는 옆에서 가끔씩, 보미나 엄마가 좋아하는 맛들을 하나씩 더 고르자고 말하곤 했다. 오늘도 보비가 고르고 있는데, 보비의 눈에 민트 초콜릿이 들어왔다. 보비는 충동적으로 이야기했다.
“아, 그리고 민트 초콜릿도 주세요.”
“민트 초콜릿이라고? 보비야, 넌 그 맛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니? 치약 같다고. 한 번 먹고 절대 안 골랐잖아.”
옆에서 아빠가 다소 놀란 어조로 말했다.
“네... 그렇긴 한데, 지금은 또 좋을 수도 있잖아요. 한 번 다시 먹어보려고요.”
라고 보비는 대충 우물거리면서 대답했다.
‘오늘 민트 초콜릿 쿠키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아이스크림도 한 번 먹어보려고요라고는 말할 수 없잖아. 그러면 아빠가 어디서 그렇게 맛있는 민트 초콜릿 쿠키를 먹었냐고 물어보실 거고, 그러면 난 아마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잘 모르겠어. 이야기하면 아빠가 뭐라고 하실까. 일단 걱정하시겠지. 이상한 곳에 갔다고. 그리고 엄마 아빠한텐 도서관에 간다고 하고,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음식까지 먹었다고 하면 분명 걱정하실 거야.’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에 도착하니 맛있는 냄새가 났다.
“음... 엄마가 오늘 뭐 한다고 했니? 냄새 좋다.”
아빠는 냄새를 맡으며 부엌으로 향하고, 보비는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보비는 침대에 벌렁 누워, 오늘 있었던 아마님과의 대화를 계속 생각했다.
다 같이 저녁을 먹고 나니, 아빠가 아까 산 아이스크림을 꺼내 오셨다. 아이스크림이네 하고 신나 하던 보미는 아이스크림 뚜껑을 열어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오빠, 이거 민트 초콜릿 아니야? 나 이거 싫어하는데. 오빠도 싫다고 했잖아.”
“야, 그냥 먹어. 싫으면 먹지 말고.”
보비는 퉁명스럽게 말하고 보란 듯이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스푼 떠서 자기의 컵에 가져갔다. 한 입 삼키자마자 보비는 속으로 ‘우웩’하고 소리를 질렀다.
‘윽... 역시 치약 같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어. 아마님의 민트 초콜릿 쿠키는 특별해서 그렇게 맛있었던 거야. 아마님이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만든다면 이렇지 않을 텐데. 윽... 이상해, 진짜.’
보비의 표정을 본 보미가 ‘거 봐’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굴렸다. 결국 아무도 민트 초콜릿 맛은 더 이상 손대지 않은 채로 후식 시간이 끝났다. 보비는 식탁 정리하는 것을 도우면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여기 미술관이 있죠? 옛날에 학교서 한 번 견학 갔었던 거 같은데...”
“그럼, 너 박물관도 가고, 미술관도 갔었잖아. 보미도 같이 갔었고. 왜?”
“차 타고 갔던 것 같은데, 많이 멀어요?”
“글쎄... 가까운 건 아니지. 도시의 반대쪽에 있으니깐. 차로 3~40분은 걸리지. 왜?”
“음... 한 번 가보고 싶어서요. 엄마, 내일 가 보면 안 돼요?”
“그래? 미술관엘? 그야 당연히 갈 수 있지. 내일은 토요일이니깐, 다 같이 가도 된단다. 그런데 웬일이니, 갑자기 미술관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
“아, 뭐... 그냥. 궁금해서요.”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보비는 곧 자기 방으로 올라왔지만,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엄마와 아빠가 주방에서 속닥거리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보비가 내일 미술관에 가고 싶대. 무슨 바람이 분 거지?”
“그래? 오늘 무슨 책 읽었냐고 하니깐, 평소엔 재잘거리던 녀석이 그냥 이것저것이라며 얼버무리던데. 갑자기 미술관이라고?”
“그러게 말이야. 그리고 먹지도 않을 거, 민트 초콜릿은 왜 샀을까?”
“그러니깐. 그 맛 싫어하잖아.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지금은 또 좋을 수도 있지 않냐면서 고르더라고.”
“흠... 녀석, 이상하네. 사춘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