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 세계의 아이들 05
주로 아이들과 놀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을 조금씩 이어 붙였습니다. 그러다 보면 희한하게, 주위 사람들에게 들은 소소한 이야깃거리나, 뉴스에서 보는 현실의 이야깃거리들도 같이 달라붙었습니다. 이야기들이 점점 더 머릿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소위 '저 세상' 존재들은 왜 우리 옆에 있으려고 하는 걸까?'와 같은 단순한 질문에서 가지치기를 한 머릿속 상상은 자꾸 커져서, 나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두리뭉실 덩어리였는데, 자꾸 이런저런 모양새가 만들어지고, 그 모양새들끼리 이야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모험도 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한 번 써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첫째가 8년 후쯤에는 읽을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꼬리표를 붙이자면 '아동 판타지 소설'이 되겠지만, 엄마인 어른의 입장에서 던져보고 싶은 현실의 문제들, 어른의 문제들도 같이 들어 있습니다.
다음날, 보비와 엄마, 아빠, 보미는 다 같이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은 하얀색의 3층짜리 건물이었다. 보비네 가족은 다 같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보미가 지루하다며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아빠는 보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엄마와 보비는 각자 보고 싶은 것들을 보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미술관 안을 걸어 다녔다. 보비는 예전에 다 같이 학교에서 왔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때도 그랬지만, 아주 재미있지는 않았다. 어떤 그림은 멋졌지만, 보통은 그냥 ‘그림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게 다였다. 한 15분 정도 둘러보았을까, 보비는 복도에 있는 의자에 잠시 앉았다. 잠시 후에 전시실에서 나온 엄마도 보비 옆에 앉았다.
“그래, 재미있니?”
“아뇨, 뭐 딱히. 멋진 그림도 가끔 있긴 한데... 엄마는요?”
“음... 엄마는 원래 미술관 좋아해. 하지만 네가 얘기한 것처럼, 막 신나고 재미있지는 않지.”
“그럼 미술관을 왜 좋아해요? 그림 보는 게 좋으세요, 엄마는? 재미있는 것도 아닌데...”
“하하하하, 놀이터나 수영장에서 막 신나게 뛰어노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지. 엄마가 그림을 왜 좋아하냐면... 글쎄, 이런저런 상상을 할 수 있으니깐 좋아.”
“상상이오?”
“응... 예를 들어 말이야... 좀 전에 나온 전시실에 있던 빨간색 옷을 입은 여자 그림 기억나니? 아주 커다란 꽃병에 꽃들이 막 꽂혀 있고, 화려한 빨간색 옷을 입은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잖아.”
“아, 네... 기억나요. 그 그림이 왜요? 그냥 여자를 그린 거잖아요.”
“그렇지. 엄마는 그 그림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한참 동안 봤어. 꽃들도 많이 있고, 여자의 옷도 화려해서 전체적으로 아주 화려한 색감의 그림이지. 그리고 여자의 얼굴도 젊고 예쁜 얼굴이었어.”
“우웩... 난 잘 모르겠던데. 별로였어요.”
“엄마 눈에도 예쁜 느낌은 안 들었어. 하지만 얼굴 자체를 가만히 뜯어보면 균형 잡히고 예쁘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단다. 하지만 예쁜 느낌, 어떤 매력적인 느낌은 안 들었지. 그리고 그림의 색깔이 화려하고 배경이나, 옷도 다 비싸고 좋아 보이는데, 그림 자체는 화사한 느낌이 들지 않았어. 왜 그럴까?
엄마 생각엔, 여자의 표정과 전체적인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아. 멋지고 화려하고 예쁜 배경과 옷과 꽃들에 둘러싸여 있는 젊고 꽤 괜찮은 외모의 여자를 그린 건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화사한 느낌은커녕 오히려 좀 우울하고 불쾌한 느낌마저 들었거든. 여자가 앉아있는 것을 보면 몸이 아주 딱딱하게 긴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단다. 편안하게 쉬고 있는, 무언가 풀어져 있는 자세가 아니고, 몸 전체가 힘을 잔뜩 주고 있는 느낌이 들어. 그리고 얼굴 표정! 상당히 복잡한 얼굴이야. 단순히 무표정한 것이 아니야.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걱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행복하거나 즐거운 얼굴은 아닌데, 그렇다고 또 막 내놓고 화를 내는 얼굴은 아니거든. 무표정하려고 애쓰는데, 무언가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아.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엄마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 저 여자는 좋은 환경에 있는 여자 같은데, 옷도 차려입고 멋진 초상화를 남기려고 하고 있는데, 왜 저런 표정과 자세일까? 그림을 그린다고 긴장했을까? 꼭 사진 찍을 때처럼 ‘자, 여기를 보고 웃으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막상 자연스럽게 웃음이 안 나오잖아.”
“맞아요. 전에 가족사진 찍으러 갔을 때, 사진사 아줌마가 계속 자연스럽게 웃어봐요라고 하는데, 짜증이 났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사진 찍으려고 일부러 앉아서 포즈를 취하는 게 이미 자연스럽지 않은데, 자연스럽게 웃으라니 뭐야. 그냥 빨리 찍지 하고요.”
“하하하하. 그랬구나. 맞아, 엄마한테도 쉬운 일이 아니었어. 그림의 여자도 그런 느낌이 들었단다. 그래서 엄마는 저 여자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굳이 기분이나 상태가 좋지 않으면 꼭 그림의 모델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미루면 될걸, 왜 꼭 굳이 그런 기분이나 상태인데 그림을 그리게 했을까? 그리고 화가도 그래. 돈에 여유가 있으니, 화가를 고용해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을 것 같은데... 화가 입장에서 돈을 받고 그리는 것이라면, 좀 기분 좋게 그려줘도 좋지 않았을까, 왜 저런 표정을 저렇게 담았을까...”
“화가는 자기가 보이고 느끼는 대로 그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그냥 친구였을 수도 있잖아요. 돈을 받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보이는 대로 그린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은 못 했네. 맞아, 친구나 아니면 연인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가까운 사람의 사정과 감정을 더 잘 알았을지도 몰라.”
“그렇구나... 전 그냥 슬쩍 보고 지나쳤어요.”
“엄마도 보통 그래. 그림이 많으니깐, 엄마는 일일이 다 보지는 않는단다. 지나가면서 보다가 궁금하거나 왠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을 보면 멈추지. 그리고 가만히 앞에 서서 들여다본단다. 그리고 상상을 하지, 이건 뭘까, 누굴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뭘 느끼고 있을까, 화가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렸을까 하면서 말이야.”
“... 엄마, 그림에도 기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에너지 같은 거요.”
“기라고? 보비 네가 그런 단어를 쓰다니, 좀 놀라운걸. 그래, 기라... 맞아. 꽤 들어맞는걸.”
엄마는 잠시 보비를 쳐다보면서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곤 허공을 잠시 쳐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엄마가 생각에 잠길 때 짓는 표정이었다.
“응, 그렇지... 사람이나 풍경이나 아니면 무엇이든, 생각하고 상상하고 느끼는 것들을 화가가 그린다고 생각해 봐. 굉장히 집중해서 자기의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을까. 엄마는 예술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분명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 어떤 순간을 그림에 붙잡아 두고 싶기도 할 거고, 자기의 감정이나 느낌을 분출하거나 표현하고 싶기도 할 거고... 분명 그런 에너지가 있겠지...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니?”
엄마는 놀라움과 기특함이 섞인 표정으로 보비를 쳐다보았다. 보비는 그런 엄마의 시선을 피하면서 작게 웅얼거렸다.
“아니, 뭐, 그냥 그 비슷한 생각을 저도 했거든요... 전 이제 다시 그림 보러 갈게요.”
보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전시실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한테 아마님의 수업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 아빠한테도 마찬가지고. 걱정하실 거야, 이상한 데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으니깐. 심지어 사람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는데 말이야.’
라고 생각하며 보비는 엄마가 이야기했던 여자의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엄마가 한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아까는 그냥 휙 지나쳤던 그림이 좀 다르게 보였다.
‘그러게... 전혀 예쁜 얼굴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깐 못생긴 얼굴도 아니야. 웃으면 좀 다르게 보일 것 같아. 그런데 진짜, 왜 저렇게 화난 얼굴이지? 아니야, 화난 거라기보단... 뭐라고 해야 할까? 걱정이 있는 건가? 아니면 둘 다인가? 슬픈 것 같기도 해. 그래, 좀 슬퍼 보이기도 해.’
엄마를 헷갈리게 했던 느낌을 보비는 알 것 같았다. 딱히 뭐라고 집어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더 그림을 쳐다보던 보비는 다른 전시실로 가기로 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설명할 수 없지만 마음에 안 들어. 이런 것도 아마님이 이야기했던 ’기‘일까? 화가나 저 여자나 다 안 좋은 기분이었던 게 아닐까? 보는 사람도 그런 걸 애매하게 느끼는 거야. 화나고, 슬프고, 걱정스럽고, 하여간 난 별로야. 엄마처럼 휙휙 둘러봐야 되겠어.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그림이 보이면 볼 거야. 이렇게 불편한 그림 말고.’
보비는 전시실을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훑어보다가, 한 그림 앞에 멈춰 섰다.
햇볕이 쨍쨍한, 왠지 오후 같았다. 그림의 오른쪽 위엔 어른 여자 두 명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대각선 방향, 그러니깐 왼쪽 아래에는 한 여자아이가 있는 그림이었다. 여자아이는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를 쓰고, 빨간색 공을 잡으려고 하는 중이었다. 공이 막 굴러가던 참인지, 여자아이는 팔을 뻗어 공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짧게 뻗은 여자아이의 팔이 아주 포동포동한 것으로 봐선 아직 유치원생 정도의 어린아이 같았다. 여자아이 옆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어서 그늘을 드리운 게 보였다. 그 아래에는 비둘기 몇 마리가 한가롭게 모이를 쪼고 있는 중이었다. 시소 한쪽 끝도 보였다. 여자 어른들이나 여자아이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림에 있는 모든 것이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그려졌기 때문이다.
‘꼭 드론에서 보고 그린 것 같아. 그런데 옷차림이 옛날 식인 걸로 봐선, 드론은 아니겠지. 옆 건물의 위층에서 본 건가 봐. 저 여자애 좀 봐. 저렇게 팔을 뻗다가 넘어질지도 몰라. 공이 저렇게 굴러가고 있으면 좀 더 기다렸다가 잡으면 될 텐데. 아직 너무 어려서, 그냥 팔부터 뻗고 보는 거야. 귀여워 보인다. 보미도 어렸을 때 저런 원피스에 밀짚모자를 쓰곤 했는데. 저긴 어딜까. 학교 운동장인 거 같아. 학교는 안 보이지만, 왠지 운동장 구석의 나무 앞 같아. 저 여자애 엄마가 아는 아줌마를 만난 거야. 그래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지. 저 애는 재미가 없으니깐 공놀이를 하다가 공을 놓친 거야. 이 그림이 마음에 들어. 별거 없는데 왠지 따뜻하다. 날씨도 따뜻하고, 모든 게 다 기분 좋아 보여.’
보비는 가만히 그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그림을 쳐다보았다. 아마님을 만난 첫날 그랬던 것처럼 그림 너머로 시선을 멀리 두고, 그림을 보면서 집중했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보비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 한번 더 그림을 보며 집중했다. 보비 느낌으로는 몇 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보비는 힘을 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에이, 뭐야. 똑같잖아. 그때는 아주 쉽게 되는 것 같았는데. 여기랑 그쪽은 다른가? 혹시 특별한 그림만 되는 걸까? 뭐, 하여간... 어쨌거나 이 그림은 마음에 들어.’
보비가 흘깃 다시 그림을 본 순간, 비둘기가 낮게 구구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비는 미술관에 웬 비둘기람 하면서 비둘기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비둘기는 보이지 않았는데, 다시 구구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비는 순간 깨달았다.
‘아! 그림의 비둘기들이야.’
보비는 다시 그림을 보았다. 바로 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더 생생하고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이 아닌 실제로 보는 것처럼, 인물과 배경의 색감이 달라져 있었다. 시소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려서 보비는 눈이 부셨다.
‘정말 따뜻한 날이네. 그리고 아주 조용하다. 아주머니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라디오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들려. 저 애는 진짜 통통하구나. 무척 귀엽다. 움직일 때마다 치마와 모자가 나풀나풀 날리네. 어이쿠! 넘어졌어. 저런... 꽤 아플 것 같은데... 울지는 않네. 그냥 툭툭 털고 다시 공을 굴렸어. 씩씩한 아인가 봐. 저 나무는 꽃이 피는 나무인가 봐. 꽃향기가 나. 저 나무 아래 떨어진 하얀 솜뭉치 같은 게 꽃인가...’
“얘, 보비야, 보비야!”
보비는 누가 팔을 흔드는 바람에 흠칫 놀랐다. 놀란 얼굴로 옆을 보니, 엄마가 보비의 팔을 잡고 흔들고 있었다. 엄마도 놀란 얼굴로 보비를 쳐다보았다.
“얘, 뭘 그렇게 놀란 얼굴이니? 완전 넋이 빠져서. 엄마가 불렀는데도 못 듣고.”
“어... 그랬어요?”
“그래, 얘. 엄마가 저쪽으로 갔는데 네가 안 보여서, 어디 있나 하고 전시실들을 지나쳐 왔거든. 아직 여기 있길래, 널 불렀는데 완전 꼼짝 않고 서 있더라. 작은 소리라서 못 들었나 싶어서 바로 옆에서 불렀는데도, 가만히 있길래, 장난을 치는 건가 했지.”
“에이, 엄마는. 내가 무슨 앤가, 그런 장난을 치게.”
“아니, 그럼 정말 못 들은 거야? 팔을 흔드니깐 그제야 깜짝 놀라면서 엄마를 봤잖아.”
“아... 뭐, 그게... 그냥 좀 생각을 하느라고요.”
“얘도 참... 무슨 생각을 그렇게 정신을 빼고 했니?”
“아, 뭐 그냥요... 엄마, 이 그림 어때요?”
보비는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렸다. 엄마는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곧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동안 보비와 엄마는 같이 그림을 보았다.
“따뜻한 그림이네. 참 별거 아닌 풍경인데 왠지 따뜻하다. 엄마가 아는 사람과 수다를 떠는 동안, 저 애는 혼자 공놀이 하나 보네. 아주 귀엽다.”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그림을 보았다.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전 이 그림이 좋아요.”
“그래, 엄마도 마음에 드는구나.”
둘은 잠시 더 그림을 보았다.
“얘, 보비야, 이제 가자. 아빠랑 보미가 한참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점심시간이 다 되었어. 엄마는 배가 고프구나.”
“네, 가요.”
보비는 엄마를 따라나서며 한 번 더 흘깃 그림을 보았다. 나무 아래 조그만 하얀 꽃들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보비는 그 꽃들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새로 나타난 것인지 헷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