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비와 친구들

생기 세계의 아이들 06

by 마싸

주로 아이들과 놀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을 조금씩 이어 붙였습니다. 그러다 보면 희한하게, 주위 사람들에게 들은 소소한 이야깃거리나, 뉴스에서 보는 현실의 이야깃거리들도 같이 달라붙었습니다. 이야기들이 점점 더 머릿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소위 '저 세상' 존재들은 왜 우리 옆에 있으려고 하는 걸까?'와 같은 단순한 질문에서 가지치기를 한 머릿속 상상은 자꾸 커져서, 나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두리뭉실 덩어리였는데, 자꾸 이런저런 모양새가 만들어지고, 그 모양새들끼리 이야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모험도 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한 번 써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첫째가 8년 후쯤에는 읽을 수 있는 재미난 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꼬리표를 붙이자면 '아동 판타지 소설'이 되겠지만, 엄마인 어른의 입장에서 던져보고 싶은 현실의 문제들, 어른의 문제들도 같이 들어 있습니다.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주말을 보내고 다시 한 주가 시작되었다. 보비는 다시 아마님을 보러 가고 싶었지만, 적당한 때를 찾기가 애매했다. 아마님네 놀러 가서 서둘러 있다가 오는 것보단, 지난번처럼 좀 더 여유 있게 있다가 오고 싶었다. 그러려면 도서관 핑계를 대거나 다른 핑곗 거리를 찾아야 하는데, 마땅치가 않았다. 게다가 마침 시험이 다음 주여서 좀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보비는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 편도, 그렇다고 시험이 있는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편도 아니었다. 시험 때면 평소보다는 좀 더 신경을 써서 공부하는 보통의 학생이었다.

‘이번 주는 공부를 좀 하고... 다음 주엔 시험을 보니깐, 일찍 마칠 거야. 시험 마지막 날이랑 다음 날엔 계속 도서관에 간다고 해야지. 그동안 책을 잘 못 읽었으니깐 말이야. 사실 그동안 진짜 책을 잘 못 읽었네. 읽고 싶은 책들이 많은데 말이야.’

보비는 다른 것은 모두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아이였지만, 책을 좋아하는 것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 보비네 가족이 모두 책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다.

‘지금은 책보다는... 그 세계에 다시 가보고 싶어. 신기하고 궁금한 것들도 있고. 그 집, 역이라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아마님이 얘기하셨는데, 무슨 일일까? 이번에 가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야. 그래, 책은... 좀 기다렸다가 읽어야지. 밤에 읽을 수도 있지만, 요즘엔 아마님과 나눈 이야기를 생각하다 보면 금방 시간이 가니깐 말이야.’

시험 전 주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보비는 학교에서 집으로 바로 돌아와, 공부를 좀 하고, 엄마를 도와 정원일도 하고, 요리도 하고, 아빠랑 캐치볼도 하고, 친구인 바미와 솔과 만나서 놀기도 하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보냈다. 보비의 엄마 아빠는 시험이라고 해서 계속 공부만 할 필요는 없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네가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공부를 하면 된단다. 하지만 사실 계속 공부만 하기는 쉽지 않아. 아무리 짧은 기간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러니깐 공부 좀 하다가, 또 다른 것도 하다가, 자연스러우면 된다고 생각해. 나중에 네가 더 크면 시험도 더 많고 어려워질 테고, 또 그럴 땐 정말 며칠 계속 공부를 해야 할 때도 있을 거야. 아직은 그런 때는 아니라는 게 엄마 아빠 생각이란다. 그러니 편안하게 하렴. 하지만 물론, 시험 땐 평소보단 조금은 더 신경을 쓰는 게 좋겠지.”

라는 게 보비의 엄마 아빠가 해주신 이야기였다. 보비 역시 엄마 아빠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고, 무척 편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보비와 친한 바미는 이 얘기를 듣고 눈을 굴리며, “야, 너네 엄마 아빤 진짜 쿨하다”라고 이야기했다. 보비는 별로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소 놀라며 “그래, 그게 쿨한 거야?”라고 되물었다.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의 보통 여자아이처럼 보이지만, 눈이 꽤 날카롭게 빛나는 바미는 꽤나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보비를 쳐다보고 씩 웃었다.

“그럼, 하긴 원래 너네 엄마 아빠는 쿨해 보여. 약간 이상하기도 하고. 물론 좋은 쪽으로 이상한 거야. 우리 엄마 아빠는 좀 피곤해. 아, 우리 엄마 아빠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야. 그런데 좀 그래.”

라고 바미는 다소 애매하게 말했다. 보비는 바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에 그냥 응이라고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비와 바미, 솔은 서로 친한 친구들이어서 각자의 집에 자주 놀러 다녔다. 바미네 엄마는 혼자서 쉴 새 없이 말을 하고, 혼자 많이 웃었다. 그리고 뭘 더 먹어라, 마셔라, 여긴 좀 더운데 저기가 어떻겠니, 심심할 텐데 이 영화를 좀 틀어줄까라면서 계속 왔다 갔다 하셔서, 바미가 매번 신경질을 냈다. 보비와 솔도 좀 짜증이 났지만, 예의를 차리느라 가만히 있었다. 바미네 아빠 역시, 엄마보다는 좀 덜 했지만, 말이 많으신 편이었다. 매번 ‘내가 재미있는 걸 들었는데 말이야, 너네들 그거 아니?’라면서 농담을 하셨다. 그 이야기들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때마다 보비와 솔은 눈치를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하지, 웃어야 하나라는 눈짓을 주고받았지만, 사실 바미 아빠는 아이들이 웃든지 말든지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으셨다. 보통은 혼자 웃고, “재미있지 않니?”라고 하시면서 또 웃으셔서, 보비와 솔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셋은 점점 더 바미네 집은 안 가고, 보비나 솔네 집이나 아니면 밖에서 만나 같이 놀게 되었다. 그게 편했다.

언젠가 바미는 보비에게 심각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평소의 바미답지 않게, 얼굴이 붉어져서 말소리도 작게 “보비야. 나 할 말이 있어.”라면서 왠지 울 듯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내 보비는 깜짝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뭔데 그래?”라고 물었다.

“우리 엄마랑 아빠 말이야...”라고 바미는 말을 시작했다.

보비는 순간 엄마 아빠가 많이 싸운다거나, 이혼을 하신다거나 하는 이야기인가 싶어서 마음이 덜컥했지만, 다행히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 좋은 이야기도 결코 아니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너랑 솔이 가고 나면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그게 싫어. 그러니깐 말이야. 우리 엄마 아빠가 나쁜 사람은 아닌데, 자꾸 너랑 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데, 그게 별로 좋게 안 들려. 아니, 그렇다고 우리 엄마 아빠가 막 흉을 보는 건 절대 아니야, 그런데...”

라고 상당히 머뭇거리면서 돌려 말한 바미의 말은 대충 이랬다. 보비가 입양아라는 것을 보비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친부모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데 집에 놀러 오고 친해지는 것이 괜찮은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다고. 마지막 부분에서 바미는 목소리를 높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래서 내가 막 화를 냈어. 보비의 친부모님은 다 돌아가셨고, 보비 엄마 아빠의 친구였다고. 그리고 친부모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게 지금 보비랑 무슨 상관이냐고. 보비는 좋은 아이고, 나는 보비를 좋아하고, 솔도 좋아하고, 우리는 다 친구들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내가 엄청 화를 냈어.”

보비는 좀 놀랐고,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크게 상처를 받지도 않았다. 보비는 지금 부모님과 아주 사이가 좋았고, 자기가 생각해도 사랑이 많은 가족이고,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비는 지금 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별로 의식한 적이 없었다. 외모는 부모님과 많이 달랐기에,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다르게 생겼네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보비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친부모님이니 입양이니라는 것을 잘 몰랐기도 했고, 보비네 부모님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보통은 악의 없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아이가 아주 예쁘네요. 그런데 부모님은 별로 안 닮았네요.”라든가, “부모님 한쪽이 외국인인가 봐요.”

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했는데, 그때마다 부모님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렇게 이야기하곤 하셨다.

“네, 우리 보비를 낳아주신 부모님은 따로 계시답니다. 저희 친구였는데,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셨지요. 슬픈 일이지만, 덕분에 보비가 우리 가족이 되어서 두 분께 감사하고 있답니다.”

이 얘기를 할 때면 부모님 두 분 다, 마지막 부분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지 않고 보비를 쳐다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보비에게 숨길 수 없는 자연스러운 눈빛 혹은 미소를 날렸다. 그건 매번 너무 자연스럽고 따뜻해서 보비 역시 어렸을 때부터 똑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사랑이라는 복잡하고도 큰 감정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 진실한 사랑의 감정은 숨길 수 없이, 단순하고 사소하고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것, 그저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비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느껴왔던 것이다.

두 분은 보비가 열 살이 되었을 때, 보비를 앉혀놓고 차근차근 진지하게 설명을 해 주셨다. 이제 보비가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좀 더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줄 게라면서 부모님은 입양이 무엇이고, 왜 사람들이 입양을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입양이 부모나 아이 모두, 혹은 한쪽에게 안 좋게 흘러갈 때도 있다는 것,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입양에 대해서 안 좋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편견’이란 것이 있다고, 편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셨다. 하지만 한편으론 입양을 통해 새롭게 가족이 되어, 같이 많은 시간과 행복을 공유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셨다. 보비를 낳아주신 친부모님은 보비가 어렸을 때 사고로 돌아가셨고, 보비의 친엄마가 지금 엄마의 친구였기에 보비를 맡게 되었다는 설명을 해주셨다. 보비의 친아빠는 외국인이어서, 보비의 외모가 조금 다르다고도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보비에게 친부모님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물어보렴이라고도 이야기해 주셨다. 보비는 당장 생각나는 것들을 좀 물어보았지만, 딱히 많이 궁금하거나 어떤 애틋한 감정 같은 것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보비가 기억하는 한, 보비의 엄마 아빠는 항상 지금의 부모님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궁금한 것이 있었던 들, 부모님이 설명을 해 주셨기 때문에 보비는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바미가 자기네 부모님이 한 이야기를 했을 때도, 보비는 상처를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미가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자기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다니 하면서 뭉클한 기분이 더 컸다. 보비는 얼굴이 좀 빨개져서 바미에게 부모님께 들은 이야기를 했다. 입양이 무엇이고, 사람들이 왜 입양을 하는지, 안 좋은 경우도 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편견을 가질 때도 있다는 것. 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가족으로 같이 살아간다는 것 등등, 그리고 자기 역시 지금 가족이 좋고, 또 친구들도 좋다는 것. 바미네 부모님께서도 아마 잘 생각해 보지 않으시고 편견을 가지셨을 거라고,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해 주었다. 바미는 보비가 하는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그래, 맞아. 편견. 우리 엄마 아빠는 너무 편견이 심해. 그리고 말을 마구 해, 나랑 동생 앞에서 말이야. 솔에 대해서도 말이야...”

라며 바미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부모님이 솔은 정말 너무 까맣다며, 아빠는 아마 우리나라 사람인데, 엄마는 흑인 외국인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렇게 섞인 것치고 너무 까만 것 아니냐며, 너무 까매서 이빨만 하얗게 보인다, 바미 너도 옆에서 놀다 보면 깜댕이 묻겠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게다가 솔의 부모님은 이혼을 했는데, 바미 너는 왜 제일 친한 친구들이 다 그렇냐며, 입양과 이혼이라니, 제대로 된 집은 우리 집 밖에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바미가 너무 빨개지는 바람에 보비는 놀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보비 역시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내가 또 정말 정말 화를 냈어. 세상에 태어나서 아마 최고로 화를 냈을 거야. 엄마 아빠는 도대체 왜 말을 그렇게 하냐, 너무 유치하다, 학교에서 사람들 피부색이나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것은 안 좋다고 배웠다, 엄마 아빠는 학교도 안 다녔냐고 소리를 질렀어. 그리고 또 그랬어. 솔이는 까맣든, 하얗든, 노란색이든, 빨간색이든, 예쁘다고. 그리고 같이 놀다가 나도 같이, 우리 모두 다 같이 까매져도 상관없다고. 엄마 아빠가 그런 말 계속하면, 그냥 나도 솔이처럼 까매져서 솔이네 집에 가서 살겠다고 그랬어. 다시는 엄마 아빠 안 보고 말이야. 그리고 제대로 된 집이라니!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엄마 아빠야말로 제대로 된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어.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집 나갈 거라고 생각했어, 진짜야!”

보비는 살짝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비록 말 자체는 서툴렀지만, 바미의 진심을 느끼기엔 충분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보비도 바미처럼 화가 났다. 하지만, 친구의 부모님이니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고, 그러기도 싫었다. 그래서 보비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바미 네 말이 정말 맞아. 솔이는 무슨 색깔이든 솔이야. 좀 이상하지? 우리는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는데. 너네 엄마 아빠도 나쁘게 이야기하려고 한 건 아닐 거야.”
“맞아, 나쁜 분들은 아니야. 하지만 가끔씩 진짜 왜 저렇게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답답하고 짜증 날 때가 많아. 내 생각엔, 난 우리 부모님이랑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잘 맞지 않는다고?”

“응...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 우리 부모님이긴 하지만,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보비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니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분명히 부모님과 닮은 점도 많고, 배우는 것도 많고, 닮아가는 것도 많지만, 우리는 부모님과 다른 사람이잖아. 생각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비슷한 것도 많지만, 다른 것도 많아. 그런데 부모님은 그런 당연한 걸 쉽게 까먹는 것 같아.”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우리 부모님은 내가 당연히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게 세상을 보고, 똑같은 걸 원한다고 생각한다니깐.”

보비는 뭐라고 반대를 하고 싶었다. 그래야 친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비 역시 바미가 맞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달리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우리가 어려서 그렇게 생각하시나 봐.”

“꼭 그런 건 아니야, 보비야. 너네 부모님은 그렇지 않잖아.”

보비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바미의 말이 맞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둘은 잠시 어색한 침묵을 이어가다가 솔이 오는 바람에 흐지부지된 적이 있었다. 바미가 그렇게 자기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터놓고 난 후, 둘은 더 친해졌다. 솔까지 해서 셋이 아주 친한 친구들이었지만, 바미는 보비에게 별별 이야기들을 더 편하게 하는 편이었다. 하긴 솔이 끼어도 분위기가 어색해진다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솔은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항상 웃는 듯한 얼굴이 예쁜 아주 명랑하고 솔직한 친구였다. 솔직하게 말을 하는 것이 가끔 기분 나쁘레 들릴 수도 있지만, 솔이 하는 말은 결코 그런 적이 없었다. 그건 아마도 솔이 잘난 체나 착한 체를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솔은 자기 스스로에게나, 남들에게나 모두 거짓말이나 무슨 무슨 체를 하지 않는 아이였다.


보비, 바미, 솔은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학교를 다녔다. 셋이 학교에 들어올 때부터 어울리기 시작했으니, 벌써 5년이 넘게 친구로 지낸 셈이다.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보비는 여자 친구가 둘이나 된다면서, 누구랑 데이트하는 거냐고 놀림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정작 셋은 다들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시작했고, 셋 다 서로에게 연애 감정을 느낀 적이 아직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셋이 친구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부모님들끼리도 몇 번 오고 가거나 식사를 할 일이 생겼고,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다. 보비의 엄마와 솔의 엄마는 둘 다 산악자전거를 좋아해서, 종종 같이 자전거를 타러 다니고, 가끔씩 술도 한 잔씩 하는 꽤 친한 사이가 되었다. 바미 부모님 역시 몇 번씩 운동이나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았지만, 초대하는 쪽이나 초대받는 쪽이나 썩 잘 맞지 않았는지 자연스럽게 그런 기회가 줄어들었다. 지금은 으레 연말이나 연초, 아니면 학기 말 정도에 한 번씩 다 같이 식사하는 것 말고는, 세 가족 다 같이 모이는 일은 잘 없었다. 그 편이 세 친구 모두에게 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부모님들과는 상관없이, 셋은 곧잘 모여서 같이 공부하거나 놀곤 했다.

시험 기간엔 특히 셋이 같이 모이곤 했다. 바미는 ‘시험 기간이니 공부 열심히 하고 있지?’, ‘오늘 시험은 잘 봤니?’, ‘뭐 먹고 싶은 것 없니? 우리 바미 맛있는 것 먹고 힘내서 공부해서 시험 잘 봐야지’ 라면서 부모님의 말을 흉내 내 다른 두 친구들을 웃게 했다.

“시험 기간엔 너무 끊임없이 괴롭히기 때문에 집에 있을 수 없어.”

라며, 바미는 투덜투덜거렸다. 그래서 셋은 보비나 솔의 집, 아니면 도서관에서 모여 같이 공부하곤 했다. 솔은 아주 성적이 좋고, 보비와 바미 역시 보통보다는 잘하는 편이었다. 솔은 모든 과목을 다 좋아하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보비는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하는 편이었고, 바미는 모든 과목을 별로 다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가 좋은지 셋 중 제일 놀기 좋아하는 데도 성적은 잘 나오는 편이었다.


사실 셋이 모이면 조금 공부하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놀다가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오늘도 셋은 같이 모여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지만,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바미가 먼저 일어섰다.

“아, 배고프다. 솔아, 뭐 먹을 거 없어?”

“응. 엄마가 다 같이 먹으라고 간식 준비해 두셨어. 먹을래?”

“그래, 좋아! 야, 너네 엄마가 전에 해주신 뭐더라, 무슨 파이 있었는데. 그거 정말 맛있었어.”

“어, 너네 온다고 하니깐, 그럼 보비랑 바미 좋아하는 간식 해야 되겠네라고 하셨어. 아, 근데 바미야, 좀 기다려. 나 이거 읽고 있는 거 끝내고 싶어. 조금만 더 하자.”

“아, 좋아.”

언제 배고프다고 말했냐는 듯, 바미는 다시 얌전히 자리에 앉아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셋은 항상 이런 편이었다. 바미가 떠뜰석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제안하면, 솔이 보통 상냥하게 웃으면서 좋다고 한다. (물론 솔이 좋다고 생각할 경우에만 그렇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솔은 딱 잘라서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편이다. 별로 그런 경우는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솔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편히 이야기하고, 둘은 아주 자연스럽게 타협점을 찾는다. 보비는 그냥 둘이 그럴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르는 편이었다.

15분 정도 더 있다가, 셋은 다 같이 간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과일과 자두 파이, 감자 계란 샐러드 샌드위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야, 진짜 맛있다. 너네 엄마 자두 파이 정말 맛있어.”

바미는 입에 자두 파이를 가득 넣은 채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았다. 보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님의 간식보다는 못하지만, 솔이 엄마의 자두 파이 역시 아주 맛있었다. 하긴 아마님의 음식은 여태껏 먹어 보았던 어떤 음식과도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건 더 진하고, 강렬하면서 또 아주 부드럽게 혀에 감기는 맛이고, 향기를 먹는 느낌이어서 보비는 그 맛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마님과 간식을 생각하다가, 보비는 불쑥 친구들에게 말을 꺼냈다.


“얘들아, 너넨 뭔가 다른 존재를 느껴본 적 있어? 귀신 이런 거 말고, 뭔가 영혼이나 에너지 같은 거?”

솔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바미는 음식을 입에 가득 넣은 채로 되물었다.

“뭐? 그게 무슨 얘기야? 귀신이나 영혼이나 그게 그거 아니야?”

보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 말은...”

보비는 잠깐 멈추었다가 아빠한테 들은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보비와 보미가 어렸을 때, 아빠가 경험한 누군가의 기척과 스치는 느낌, 아이들이 가진 강력한 생명력과 에너지들이 튕겨 나오고 부딪친 것이 아닐까 하는 아빠의 생각, 아빠가 생각하는 ‘사람과 다른 존재’란 영혼이나 혹은 어떤 에너지 흐름인데, 우리가 이름을 붙일 수 없거나, 잘 모르는 ‘무언가 다른 어떤 것’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

바미와 솔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곧 바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바미는 생각을 정리해서 이야기하기보단,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쏟아 놓다가, 혼자 다시 정리하는 편이었다.

“난 당연히 너네 아빠가 거짓말하거나 이야기를 꾸며내는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너네 아빠가 그런 걸 느끼셨다면 정말이겠지. 하지만 정말 그게 뭘까? 내 생각에도 귀신같진 않아. 이야기에 보면 귀신은 보통 원한이 있거나, 나쁘거나, 하여간 뭔가를 원해서 사람들 주위를 떠도는 거 아니야? 그리고 밤에 나오잖아. 아닌가? 그런 건 상관없을지도 몰라. 하여간... 왠지 귀신같지는 않아. 귀신은 뭐랄까, 좀 더 음산할 거 같아. 그런데 너네 아빠 이야기에 나오는 존재는, 그러니깐 무슨 존재가 거기에 있다면 말이야. 그렇게 무섭거나 음산한 거 같지 않아. 에너지나 생명력은... 솔직히 난 거기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아이들이 있는 집이 시끄럽긴 하지만, 그게 에너지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에너지는 발전소에서 만드는 거 아니야? 석유나 원자력으로 전기를 만드는 거 말이야.”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솔이 끼어들었다.

“바미, 네가 말한 것도 에너지야. 왜, 에너지를 절약하자라고 이야기하잖아. 아니면 청정에너지란 말도 있고. 태양 에너지나 풍력 에너지처럼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에너지. 하지만 어른들이, 너는 정말 에너지가 넘치는구나라는 이야기를 할 때는 좀 다른 의미잖아. 보비 아빠가 이야기한 건 약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에너지는 ‘물체 내부에 간직되어 있는 일’이란 뜻의 그리스어에서 나왔대. 움직이거나 빛을 내거나, 뭔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에너지래.”

그 사이 핸드폰에서 인터넷 검색을 한 바미가 큰 소리로 검색한 내용을 읽었다.

“그럼 우리도 아기들도 에너지가 넘치는 게 맞잖아. 아기들은 쉴 새 없이 움직이니깐. 우리는 그렇게 많이 움직이지는 않지만, 어른들에 비하면 많이 움직이니깐 그렇게들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에너지가 넘친다고.”

“그래, 맞아. 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움직이는 걸 통해서 에너지가 나오고 있다는 걸 아는 거지. 전기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전제품도 돌리고, 충전도 하고 그러잖아.”

바미와 솔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활발하게 했고, 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귀신이니 영혼이니 에너지니 하는 이야기는 왜? 에너지에 대한 게 이번 시험에 나오는 거야?”

불현듯 바미가 물었다.

“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

바미와 솔의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에, 보비는 좀 더 이야기했다.

“얼마 전에 아빠랑 이런저런 이야길 하다가 아빠가 그런 이야길 들려주셨길래 재미있게 들었거든.”

바미와 솔은 그냥 고개를 으쓱했다. 썩 석연치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달리 중요하거나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보비는 곧 같은 반 친구 이야기를 꺼냈고, 셋은 학교와 친구들 이야기를 한참 하면서 간식을 다 먹었다. 셋은 다시 솔네 방으로 가, 공부를 좀 하다가 저녁때가 다 되어 헤어졌다. 보비와 바미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왔고, 저녁때 먹을 빵을 사러 가야 한다는 솔도 같이 따라나섰다. 방향이 다른 바미는 곧 둘과 헤어졌고, 보비는 솔과 같이 집 쪽으로 걸어갔다. 솔네 가족이 항상 가는 빵집은 보비네 집 쪽에 있어 둘은 같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있잖아, 네가 아까 한 얘기 말이야. 영혼 이야기. 아까 에너지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못 했는데, 나는 영혼이라는 걸 믿어.”

솔이 문득 이야기를 꺼내서 보비는 순간 놀랐다. 늘 그렇듯이 솔은 막힘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바미와 달리 솔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한 후에 말을 한다. 정리하고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미와 달리 왔다 갔다 하지 않고, 고르게 말을 하는 편이다. 게다가 솔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해서, 솔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가 많았다.

“그런데 내가 영혼이라고 말할 때, 그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귀신이나 원령이나 유령 같은 건 아니야. 영화나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에게 겁을 주는 존재들 있잖아. 난 그건 그냥 이야기라고 생각해. 내가 생각하는 건, 오히려 그냥 좀 더 평범한 거야. 몸은 없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너나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존재. 바람처럼. 물론 바람은 우리와 어떤 교류를 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사실 나도 직접 경험한 건 아니고, 들은 이야기야. 우리 엄마한테.

너도 알다시피, 우리 엄마는 여기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잖아. 우리 엄마는 막내딸이자, 유일한 딸이어서 외할머니가 무척 예뻐하셨대. 우리 엄마가 결혼하고 나를 임신했을 때, 외할머니는 정말 너무 좋아하셨대. 하지만 외할머니는 나이가 아주 많으셨던 데다가 몸도 안 좋으셔서 비행기 여행을 하는 것이 어려웠나 봐. 그래서 우리 엄마는 핸드폰으로 내 사진이나 비디오도 많이 보내고, 영상통화도 많이 하셨다고 했어. 엄마 말로는, 엄마가 할머니에게 농담도 많이 하셨다고 했어. 그렇게 손녀가 예쁘냐고, 딸은 보이지도 않나 보다라면서. 그러면 할머니는 손녀 때문에 딸이 더 예쁠 정도로, 손녀가 너무 좋다고 하셨대. 물론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한참 바바바, 마마마 하면서 옹알이를 하기 시작할 때, 영상통화로 할머니를 보면 나나, 나나 하면서 웃곤 했었대. 원래 그 나이 때의 아기는 어른이 보는 것처럼 잘 볼 수가 없다고 들었어. 하지만 엄마와 할머니는 내가 할머니를 알아보면서 좋아하는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셨다나 봐. 그즈음에, 할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곳으로 오시기로 하셨대. 일단 결정을 하니깐, 할머니는 정말 너무 행복해하셨고, 건강도 더 좋아지셨대. 여행을 너무 기대하셨고,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는 더 젊어지신 거 같았다고 엄마와 삼촌들이 나중에 이야기해 주셨어. 그런데 비행기 타시기 며칠 전, 항상 가시던 병원 검진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 사고가 크게 났대. 엄마는 지금도 그 얘길 하면 울먹울먹 하셔. 나도 슬프고.

사고가 난 후, 할머니는 병원으로 실려가셨어. 아주 크게 다치시는 않으셨지만, 워낙 연세가 많으셔서 그런지 정신을 잃으셨대. 결국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어. 한 일주일 정도인가 병원에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대.”

솔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직 영혼과 관련된 부분이 어디 있는지 딱히 알 수 없었지만, 보비는 아무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솔이 다음 할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솔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할머니가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말이야. 평소와 마찬가지로 나는 낮잠을 자고 있었고, 엄마는 부엌에 계셨대. 나는 아기 침대에서 잠을 잤는데, 낮잠을 자면 깨지 않고 2시간 정도 잤었대. 내가 깰 시간이 되면 엄마가 날 들여다보러 오셨다고 했어. 그날은 엄마가 뭐 때문인지 잠깐 깜빡했다가, 평소보다 30분 정도 늦게나 깰 시간을 알아채셨다나 봐. 시계를 보고, 벌써 이렇게 시간이 되었나, 아직 울지 않고 조용한 거 보니, 오늘은 많이 자나 보네 하면서 나를 보러 오셨대. 그런데 나는 이미 완전히 깨서 혼자 웃으면서 팔다리를 흔들고 있더라는 거야. 그리고 나나, 나나, 나나 하고 옹알이를 했대.”

“네가 할머니랑 통화할 때 하던 옹알이 말이야?”

“응. 엄마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나를 안아 올렸대. 기저귀를 갈려고 말이야. 그런데 나한테서 냄새가 나더래. 아니야, 똥 냄새가 아니고.”

막 뭐라고 말하려던 웃음기 어린 보비의 얼굴을 보면서 솔은 먼저 얼굴을 찌푸렸다.

“풀이나 꽃 냄새 비슷한데, 달콤하기도 하고, 또 나무껍질 같은 냄새도 살짝 나고. 엄마가 아주 잘 아는 냄새였대. 할머니 냄새라고 엄마가 그랬어. 엄마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시골이었는데, 이웃에 바닐라 농장이 있었대. 너 바닐라빈 본 적 있어?”

“응, 우리 엄마가 케이크나 쿠키 만들 때 쓰셔서, 집에 있어. 그리고 참, 우리 엄만 설탕 그릇에도 넣어 놓으셔. 냄새 좋던데. 근데 생긴 건 그냥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더라.”

“응, 맞아. 그거야. 우리 엄마와 할머니 고향엔 바닐라 농장이 꽤 있었대. 바닐라 꽃이 지면 그 꼬투리를 따서 데치고, 말리고, 또 기다리고를 한참 해야지 그런 좋은 냄새가 난대. 할머니도 농장에 가서 일을 많이 하셨었는데, 바닐라빈을 얻어 오실 때가 많았나 봐. 농장에서 돌아오시는 할머니에게 달려들어 안기면 벌써 그 달콤하고 향긋한 바닐라빈 냄새가 나서, 엄마는 그 냄새를 한껏 들이마시곤 했대. 할머니는 향수를 뿌리지 않으셨는데, 대신 옷을 다릴 때 바닐라빈을 담가 둔 물을 뿌리곤 했대. 그래서 항상 할머니한텐 아주 은은하게 바닐라 냄새가 났다고 그랬어. 그 냄새가 나한테 나더라는 거야. 엄마가 그렇게 나를 안고 있는데, 삼촌에게 전화가 왔대. 할머니가 바로 조금 전에 돌아가셨다고. 엄마는 우셨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손녀를 보러 왔다고 생각하신 거야. 엄마는 나를 안고 흐느껴 울다가, 웃다가 했대. 그렇게 오고 싶다고 하다가, 마침내 오기로 하셨는데 사고를 당하셨잖아. 그래서 할머니가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할머니는 어떻게든 손녀를 만나러 오신 거야라고 엄마가 얘기했어.”

“... 그랬구나.”

둘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나는 당연히 기억이 하나도 안 나. 하지만 엄마가 해주신 이야기를 믿어. 할머니가 나를 보러 오신 거라고 믿어. 당연히 할머니의 몸은 올 수 없지만, 할머니의 영혼이 왔었다고 말이야. 나한테 와서 인사를 하고, 같이 좀 놀아 주시다가 가셨을 거야. 그러니깐 내가 그렇게 할머니에게 아는 척을 하느라 옹알이를 했을 거고.”

“응, 나도 믿어. 분명 너네 할머니야.”

“그렇지?”

밝게 웃으며 솔은 보비를 쳐다보았고, 보비도 같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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