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장 자기 집으로 오란다. 무슨 급한 일이 있나 해서 달려갔다. 뒤편 베란다 서랍에서 오래된 병하나를 내온다. 귀한 거니 마셔 보란다. 묵었으나 신비한 향이 코를 찌른다. 진짜 산삼주란다. 이번에 이삿짐을 싸면서 발견한 것이라 했다. 이사를 안 했으면 못 얻어먹었을 것이다.
그동안 사랑이 대체 어디에 숨겨 있는지 뒤져봤다. 일상 속에, 계절 안에, 만남 뒤에, 영화에서, 그림에서, 음악에서, 가족 안에, 친구 속에, 늘 맞는 아침 안에..... 사랑은 놀랍게도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이사를 하려다 보면 서랍속에서 나오는 잊었던 사진이나 일기장, 헌 책이나 신발처럼. 그렇게 이삿짐 뒤지듯이 글을 썼다. 광각렌즈로 흘러가는 일상을 들여다보는 호기심으로, 어떤 두럭에서 큰 놈이 나올지 모르는 고구마를 캐는 긴장감으로, 마감 시간에 닿아야 하는 신문기자의 발걸음으로, 만취하여 찾은 귀소본능의 집에서도 컴퓨터와 머리를 주억거리는 나와의 약속으로. 아내가 입에 달고 말하는 사서고생이란 말이 사자성어로 들리는 저녁 앞에서.
억지로 쓴 글을 친구가 보더니 네 글자로 요약한다. 자아도취. 사전을 찾아보니 자신의 세계에 빠져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상태. 맞다, 난 그림을 그릴 때도 글씨를 쓸 때도 그 시간만큼은 푹 빠지는 타입이다. 아니다,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사는 것은 철이 없다는 뜻이다. 맞다, 예술가나 문학가 중에 자선사업가가 얼마큼 있는가. 자신에 미치지 않고서야 작품이 나올 수 없지 않은가. 아니다, 그래도 독자의 생각은 따끔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 걸까.
이삿짐을 푼다. 많이 버렸음에도 새로 찾은 사랑이 너무 많다. 하나하나 수건으로 닦아 서랍에 넣는다. 또 이사 갈 때나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내 손 끝에 닿았던 흔적으로 마음은 부자가 된다. 사랑이 내게 준 썬 글라스를 낀다. 쓸데없는 세상의 빛이 차단되고 시야가 아늑해진다. 일상이 가라앉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이사 온 집이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