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그랬다. 늘 잔치집이었다.
우리 식구가 열명이 넘었고 일꾼들만 해도 일곱 여덟 명이 되었다. 낮이면 사랑채가 손님으로 붐볐고 밤이면 아버지를 비롯한 일꾼들의 숙소로 쉴틈이 없었다. 명절이면 마당엔 떡판이 놓이고 일꾼 몇 명이 열심히 떡메를 치곤 했다. 마을사람들까지 모여 음식준비를 하면 그 넓은 마당이 비좁아 비켜 다녀야 했다. 숟가락 두 개 가지고 출가를 한 부모님이 낮이면 품앗이를 밤이면 새끼를 꼬아 일군 집안이었다. 마을에 우리 땅을 안 밟고는 지나가지 못할 정도의 가세를 이루었고 아버지 또한 마을의 이장이 되어 안팎으로 바쁜 날들이었다. 3남 8녀 열한 명의 자녀 중 열 번째로 태어난 나는 어머니 나이 마흔에 낳은 막내아들이었다. 큰형과 나는 18년 차이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큰형이 아버지의 권유인지 강압인지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결혼하던 해에 내가 나왔다. 큰형수님이 2월에 시집와서 시어머니께 절하는 것을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그 절을 받았다. 거꾸로 누워서. 물론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해 5월 단오, 드디어 이 몸이 나왔다.
내가 짐작하기론 단옷날 만삭의 어머님께서 그네를 타고 싶어 하셨다. 가족들은 모두 말렸는데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큰 누님이 부엌에 들어가 가위를 가지고 나왔다. 큰 누님은 어머니의 그네가 구름에 닿아 있을 때 어머니의 얼굴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챘다. 얼른 동생들의 치마를 벗겨 넓게 펼치도록 했다. 뒤쪽 하늘에 닿았던 그네가 앞으로 내려 달리는 순간 드디어 원심력에 의해 내가 튀어나오게 된다. 길게 탯줄에 매달려 나비처럼 날아오르던 그때를 놓치지 않고 큰 누님은 가위로 탯줄을 끊었다. 나는 무사히 누나들이 쳐놓은 치마 보호천에 안착되었고 무사하다는 신호로 앞산이 떠나갈 정도로 울음을 터뜨렸다. 성공이었다. 다만 그때 셋째 누나가 보호천 잡기를 게을리 한탓에 허리가 조금 욱신거린 것이 지금까지 영향이 있는 정도였다. 이 얘기를 친구들한테 하면 웃긴다고 손사래를 친다. 믿거나 말거나 내 탄생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나는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다. 어쨌든 그렇게 나온 나는 온갖 집안과 동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출산을 했다는 표시로 대문 앞에 다는 나무도 아버지가 앞산에 올라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소나무를 베어다 달아 누이들의 질투를 샀다. 겨울에 썰매도 내것은 달랐다. 다른 친구들은 나무토막밑에 무딘 칼날을 붙인 보통의 것이었다. 그러나 내것은 아버지가 어디서 구하셨는지 썰매의 모양을 한 쇠로 된 만든 것으로 동네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그러던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형님을 따라 서울로 전학을 왔다.
집은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정도의 골목에다 지붕들도 머리를 숙이고 지나야 할 정도로 낮은 막다른 집이었다. 드넓은 평원에서 맘껏 뛰놀던 야생마가 한 움큼 마구간에 갇힌 신세였다. 게다가 내 집도 아니고 방한칸을 얻어 세로 살았으니 주인집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전기를 많이 쓴다, 물을 필요 없이 자주 튼다, 갑자기 다른 별에 떨어진 기분이다. 그런데 그런 정도는 눈 감을 만했다.
어느 날 방에 있는데 마루에서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뭘 떨어뜨린 것이겠지 했다. 그런데 다음날 오후에도 똑같은 소리가 났다. 살며시 미닫이 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마당의 수돗가엔 주인집 아줌마가 툴툴거리고 있었다. 소리가 난 마루를 보니 여섯 살 된 주인집 아이가 뒹굴고 있었다. 그런데 울음소리도 없다. 도대체 쿵하는 소리는 어디서 난 걸까. 저 미라처럼 뼈만 남은 아이가 뭘 떨어뜨릴 리도 없고. 그다음 날에서야 상황을 파악하게 된다. 수돗가에서 아이를 씻긴 주인집 아줌마는 아이의 한 팔을 잡고 그 아이를 마루로 집어던지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 기가 막히게 마루에 안착하는 것이다. 아니, 저런 어린애를. 나는 불쌍해서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아줌마의 말이 내 발을 막아섰다. “옘병할 놈, 어디서 저런 놈을 주워와 가지고.” 형님한테 들으니. 주인집 아저씨가 밖에서 낳아 데려다 놓은 자식이란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얼마나 행복한 놈인가 생각했다. 저놈이나 나는 똑같이 나비처럼 날았지만 나는 누나들의 폭신한 치마의 쿠션으로 받혀졌고 저 친구는 한쪽 날개가 없는 나비처럼 받힐 것 없는 마룻바닥에 그냥 내동이 쳐졌다. 나는 동네가 떠나가도록 울 수 있었지만 저 친구는 그저 울음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탯줄을 자른 나와 핏줄이 잘린 저 친구의 차이.
나의 서울생활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뿐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충격의 시작이었다. 방학에는 시골을 다녀오며 천국과 지옥의 왕복 열차를 타곤 했다.
한참이나 시간의 여울이 지난 지금, 서울 나비는 어디쯤에서 몸을 건사하고 있을까. 제대로 날고는 있을까. 봄은 다시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