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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티브스피커 Nov 29. 2022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잘 지내고 있는데 내 마음 한 부분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매일 아침저녁 출퇴근 차 안에 혼자 있을 때 뉴스를 듣다가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자기 전에 누워서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른다. 새벽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내가 아는 아이가 그곳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 며칠 전까지 눈앞에서 웃고 있었는데 이 세상에 없단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이게 무슨 일인지... 내가 이런데 그 아이의 가족과 부모는 지금 어떨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며칠 전 <더 타투이스트>에서 8년 전 18세였던 이제는 스물여섯이 된 세월호 생존자가 나온 걸 봤다. 고통을 견뎌 온 시간이 양쪽 팔에 나이테처럼 그어져 있었다. 그 상처에 이제 예쁜 타투를 새겨 넣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상처와 꽃이 그 아이의 팔에 어우러졌다. 그 아이가 같은 생존자 친구에게 말했다. "내 상처를 처음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 웃고 있던 친구가 담담하게 말한다. "흉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 나에게도 슬픔을 표출하는 나만의 방식이 있었으니까. 이게 네 방식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더 이상 상처를 내지 않는다는 아이의 말에 또 다른 생존자 아이가 말한다. "너~무 좋아." 몸에 난 수많은 상처에 비견할 만한 그 아이의 방식은 뭐였을까? 터널을 지나온 친구들이 서로 마주보며 웃는다.


가을날 그 장소에서 친구를 잃고 겨우 살아남은 아이들은 이제 또 어떻게 앞으로의 시간을 견딜까? 어떤 고통의 시간을 보낼까? 그리고 무력하게 그 참사를 지켜봐야 했던 우리는 4월의 눈부신 하늘을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그리고 나는 이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을의 새파란 하늘도 빼앗겼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아무도 자신만으로 완전하 섬이 되지는 않는 것이니,
모든 사람이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라.
한 줌 흙이 바닷물에 씻겨 나간다면 유럽은 그만큼 더 작아지는 것이리라.
나 자신이 인류의 한 부분이니, 친구의 죽음은 곧 나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리라.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려 하지 말라.
그것은 곧 너 자신을 위하여 울리는 것이므로.

- 존 던 (1572~1631)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헤밍웨이, 열린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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