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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티브스피커 Nov 16. 2021

Call me by your name!

부모가 자식을 수용한다는 것은...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한 소년의 성장통을 매우 섬세하게 그린 아름다운 영화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 있는 영감을 주는 영화지만, 부모가 자식을 수용한다는 것의 의미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그 아이만의 특별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 조합이 너무나 다양해서 세상에 같은 아이는 없다. 그건 본질적으로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부모가) 내 아이를 수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경계와 한계가 있을까? 더 나아가 내가 내 아이의 특성을, 존재를 수용한다는 게 맞는 말이기나 할까? 내 아이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존재다. 그리고 그 안에 수없이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부모인 나조차도 내 아이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알 수 없다. 그중 어떤 것은 수용하고 어떤 것은 수용하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타인을 수용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수용의 대상이 되는 입장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데 타인의 수용이 무슨 의미인가? 수용은 전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에게 한정된 문제다. 따라서 내가 오로지 내 좁은 시야 때문에, 무지한 편견 때문에, 일천한 경험 때문에 내 아이를 수용하는 데에 한계를 짓는다면 그건 서로에게 무척 비극적인 일일 것이다.


아이가 어떤 존재적 특성을 가지고 있든 아이가 어떤 고민을 하든 어떤 결정을 하든 부모는 세심한 관찰자의 눈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다가 아이가 힘들어서 문득 고개 들어 주위를 살필 때 바로 그 자리에 있어 주면 된다. 설혹 내 아이가 세상 전체와 맞서 있을 때라도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와 같은 곳을 바라볼 것이다. 내 아이가 외롭지 않게. 내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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