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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MH Nov 01. 2020

낯선이에서 친숙한 사이가 되기까지

만 4세반에 출근한 첫날 일이다.

여자아이들이 천을 덮어 길게 늘어뜨린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서 속닥속닥 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엇을 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했고, 안전 문제도 점검할 겸 천을 들어 올려 들여다보았더니 동물 인형들과 상황 놀이를 하고 있었다. 같이 참여하려고 보니 뱀 인형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짧고 낮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나는 파충류를 지독히 싫어한다. 그중 발이 달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싫어함을 넘어서 공포심을 느낀다. 나의 비명은 그 공포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차 싶어 아무 일도 아닌 척 굴었지만 눈치 빠른 녀석이 얼른 뭔가를 눈치채고는 옆 친구에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선생님, 뱀을 무서워하나 봐. 우리 놀라게 해 주자.’ 그들의 음모는 길지 않은 시간에 실행에 옮겨질 것이 느껴졌고, 나는 호흡을 고르며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남들에게는 우스운 일일 수 있겠지만 그림에 나온 뱀조차 보기 힘들어하는 나로서는 여간 큰일이 닥친 것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긴장으로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드디어 그 순간이 다가왔다. 녀석들은 빠르고 강한 공격을 해 왔다.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뱀 인형을 나에게 던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당당하고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고 바들거리는 손떨림을 애써 감추면서 그 뱀을 집어 들고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다소 엄격한 목소리를 내면서 인형을 던지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며, 다 놀았으면 제자리로 갖다 두는 것이 좋겠다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그 물건을 만졌다는 것 만으로 몸이 떨릴 지경인 나에게 그들의 속삭임이 다시 들려왔다. ‘뱀을 무서워하는 게 아닌가 봐.’ 그 소리는 그들에게 기선을 제압당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선생으로서의 위엄이 먹힐 수 있다는 중요한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 


험난한 하나의 고비를 넘겼을 뿐이다. 아직 테스트는 남아있을 것이고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다음 대결 종목은 무엇이 될까? 그들의 테스트는 느닷없는 상황에서 전개될 것이고 나는 어떤 대비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긴장은 아마도 며칠 아니면 더 오래 지속되어야 할 것이었다. 


보호자들의 두려움을 아이들은 그대로 학습하는 경우가 많다. 보호자들은 때로는 아이들 앞에서 포커페이스로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상을 대할 필요가 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파충류관에 견학을 간 경우가 여러 번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파충류를 좋아했다. 왜 그럴까? 특히 호주의 파충류는 종류도 다양할 뿐 아니라 맹독이 있는 것이 많아 위험성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라도 동물원마다 파충류관이 꼭 있었다.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데다가 그 습성도 다양하니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 하기는 하겠다. 나는 파충류에 대해서는 말하거나 쓰는 것도 두려워할 만큼 심각한 공포를 가지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온갖 호흡법과 기도를 다 바치고서는 파충류관에 들어가곤 했었다. 아이들의 질문에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도 사실 나의 눈은 허공으로 향하거나 어둠을 빌려 감고 있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이 다 커서야 나는 나의 두려움을 고백했고, 그 지긋지긋한 파충류관에는 너희끼리 들어가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 아이들은 파충류에 대한 공포감은 없다. 적어도 갇혀있는 파충류를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 같아 정말이지 다행이다.   


그 반에는 만 4세 여아 메리도 있었다. 첫 만남 후 말 끝마다 잘난 체를 하고 자신에게 말을 걸 때마다 다소 공격적인 언사를 일삼았다. 메리는 여러 아이들 앞에서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전체 반의 리더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금방 파악이 되었다. 메리와 좋은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내가 그 반의 아이들을 수월하게 이끌 수 있는 열쇠가 될 것 같았다. 아이들은 새로 온 선생을 파악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고, 나는 그들의 선생으로서 인정받아야 할 시간이 촉박했다. 초보 선생인 나로서는 별 소득 없이 시간만 흐른다고 느껴져 초초해질 때쯤 의외로 단순하게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어느 날 메리가 여러 명의 아이들을 대동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 옆으로 오더니 나에게 ‘피피’ 냄새가 난다고 도발을 시작했다. 즉 오줌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지만 나는 침착함을 잃지 않을 만큼 훈련이 되어있었다. 그 정도쯤 이야. 웃으면서 침착하게 ‘피피는 참 맛있지?’라고 했다. 그 아이가 낄낄거리길래 넌 피피를 먹어보지 않았냐고 덧붙였더니 이번에는 당황한 얼굴이 되어 내 옆으로 바싹 붙더니 ‘뭐?’하고 되묻는 것이었다. 지기 싫어하고 자기주장이 센 만큼 호기심도 강한 아이였다. 나는 조용하게 ‘피피’는 매우 맛있는 조개 이름이야. 너도 먹어보면 그 맛에 놀랄 거야라고 침착하면서도 무심한 듯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사실 중국 식당에 가면 우리가 자주 주문하는 조개 조림이 있는데 그 조개의 이름이 ‘피피’였던 것이다. 이 소소한 나의 일격으로 메리의 태도는 일변하였다. 눈초리가 부드러워졌을 뿐 아니라 반짝이는 호기심으로 다가와서 그게 뭐야 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나는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고, 다들 갑작스럽게 중국 식당에 가 본 경험에 대한 이야기로 열을 올리는 형편이 되었고, 나에 대한 경계심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메리가 가장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질문을 해댔다. 메리를 따르던 다른 어린이들도 내 주변으로 몰려들어서 서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동안 왁자지껄했다. 메리는 까칠한 아이가 아니라 한창 뭔가를 궁금해하고 새로운 교사를 유심히 관찰하는 총명한 아이였다. 


그 단순하고 별 볼 것 없는 사건 이후 메리는 나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 잘 놀다가도 한 번씩 나에게 다가와 얼굴을 비비고 가는 등 나는 그 아이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으로 승격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혼자 탐색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새로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과정에서 날카로운 면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보호자는 침착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다림만으로는 또 충분하지 않다.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대담하고 적절한 대처로 믿음을 쌓아야 한다. 그 계기가 어떤 때,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마음을 졸이게 된다.   


아이들은 친숙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돌발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로 신뢰감을 쌓을 때까지 그런 행동이 계속되는 통에 빠른 시일 내에 아이들과 친숙해지고 신뢰감을 쌓는 것은 처음 만나는 아이들과 교사 사이에서 큰 숙제였다. 신뢰감이라는 것은 상호적인 것이어서 내가 원한다고 쌓아지는 것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노력이 별 소용이 없을 때도 많았다. 어떤 때는 무슨 일이 계기가 되었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관계가 단단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신뢰가 쌓이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 친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 아이가 계속 반대로 이야기할 뿐 아니라 말장난까지 하는 통에 힘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만 3세에서 곧 4세가 되는 크리스였다. 다른 교사가 그 아이는 몹시 다루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겪기 전에는 어떤 주의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가 어느 날 점심으로 나온 파스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팔짱을 끼고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은 파스타를 좋아한다며 잘 먹었던 것이 생각나서, ‘네가 좋아하는 파스타인데?’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뜸 ‘나는 집에서 먹는 파스타만 좋아해’하고 고개를 돌리고는 사과만 먹었다. 그다음 날은 사과도 먹지 않길래 ‘왜 오늘은 사과를 먹지 않냐’고 했더니 ‘나는 초록 사과만 먹어’라고 대답하면서 사과를 외면했다. 분명 그 전날은 빨간 사과를 맛있게 먹었는데도 말이다. 


음식뿐 아니라 사사건건 이런 식이었다. 내가 하는 말에 대해서는 무조건 정반대의 행동이나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침착하고 최대한 느긋하게 행동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 때가 많다.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에서 말썽꾸러기 강아지들 앞에서 견주가 하품을 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이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보호자가 느긋하게 한 발 뒤로 물러나거나 편안한 심리상태를 내보이는 것은 확실히 아이와 보호자 사이에 놓인 팽팽한 긴장이 누그러뜨려지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의 말이나 원하지 않는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면 그 자체를 놀이로 생각해서 재미있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속수무책일 것 같은 시간은 자꾸 갔다. 속으로는 크리스의 행동이 괘씸하기도 했고, 어떤 방법으로도 개선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지치기도 하고 조바심이 일기 시작한 어느 날 센터에 들어서자마자 크리스는 나에게 달려들어 와락 껴안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당황스러웠다. 크리스의 엄마도 어깨를 으쓱하며 나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도대체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루아침에 돌변했던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여전히 말썽꾸러기에 속하긴 하지만 그 얼마 전부터 말마다 토를 달거나 반대로 말하거나 하는 것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상기되었다. 나는 골똘히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크리스가 좋아하는 책을 같이 많이도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 책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곰인형이 그려진 책으로 크리스가 선택해 온 책이었다. 그 책만 반복해서 읽었는데 크리스가 흥미로워하는 부분은 재미있는 소리까지 더해가며 성의를 다해 읽었다. 별 일 아닌 듯 보였지만 이런 작은 일들이 쌓여 서서히 나와 신뢰가 형성되고 더 이상 의도적으로 나를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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