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물처럼 보이는 밍밍하고 맑은 국물에 실뭉치처럼 돌돌 말린 매밀면 그리고 물가의 부유물처럼 떠있는 얇게 썬 무, 고명으로 올려진 사각의 편육과 비스듬히 누운 삶은 달걀 … 내가 평양냉면을 처음으로 맛본 것은 20년 전, 어느 여름날 사장님과의 점심 식사자리였다. 기차 칸처럼 줄줄이 붙여 앉은 식탁 위에 냉면인 듯 냉면 같지 않은 이 음식이 놓였을 때, 나는 직장인의 기쁨이자 구원인 소중한 한 끼의 점심이 사라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봤다. 제법 나이가 있는 부장급과 임원급들은 눈을 반짝이며 입맛을 다셨고, 내 나이 또래들은 식탁 한가운데 놓인 주먹만 한 찐만두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새 모이만큼 떠먹어 봤다. 잘 익은 동치미 국물에서 느껴지는 또렷한 짠맛과 은은하게 옅은 육향이 났다. 면은 푸석푸석한 식감에 누룽지 같은 메밀향이 났다. 한 미디로, 뭐라 종합적으로 어떠어떠한 맛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냉면인 듯냉면 같지 않은 맛이 났다. 그런 나를 힐끔 보던 이사님이 후루룩후루룩 우아하게 면치기를 하신 후, 그릇째 국물을 크게 한 모금 마시고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 아직… 평냉이 맛있을 나이는 아니지 ” 어느덧 그때 이사님의 말처럼 평냉이 맛있을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냉면인 듯 냉면 같지 않는 평냉의 깊고 담백한 맛에 푹 빠지고 말았다. 특히, 마음속이 찬밥에 남은 반찬을 이것저것 다 쏟아붓고 제멋대로 비벼 된 비빔밥인 듯 비빔밥 같지 않은 날이면, 평냉 한 그릇이 간절해진다. 그걸 한 그릇 시원하게 비우면 체하기 직전인 마음속이 쑥 하고 속시원히 내려갈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평냉은... 내 마음이 먹는 활명수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즉슨 마음의 평화를 위한 마음의 평냉인 것이다. <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