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야근과 밤샘 작업으로 출근이 뒤죽박죽인 광고회사에서, 출근시간으로 1등과 2등을 번갈아 차지하며 친해진 후배와 작년에 이탈리아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메타의 상무로 근무하고 있는 그녀는 월드와이드로 퍼져있는 직장 동료들의 도움으로 여행 스케줄을 완벽하게 짠 후에, 저에게 구글 스프레드시트로 보냈습니다. 그녀의 일정에 맞춰 비행기표를 사는 것으로 저의 여행 준비는 단박에 끝이 났죠. 5월의 이탈리아는 아름다웠고, 날씨는 예상보다 더웠지만 여행 내내 비 한번 오지 않았답니다. 그녀는 IT업계의 임원답게 수시로 자신의 회사가 만든 앱을 열어 피드를 보고 빙긋 미소를 짓고 '좋아요'를 눌렀습니다. 물론, 틈틈이 여행 중 사진을 찍어 업로드하기도 했죠.
똑같은 돈을 내고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왠지 저보다 그녀가 더 당당하고 멋져 보였습니다. 식당에서 가끔 사교성이 넘치는 이탈리안들이 음식을 내주며 저희의 직업을 물으면,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메타'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답을 했고, 저는 잠시 머뭇거리다 프리랜서 작가라고 식은 수프 같은 목소리로 답을 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조금씩 초라해지는 순간들이 여행 내내 쌓여갔습니다.
여행의 끝, 항공사가 다른 그녀와 저는 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비행시간이 빠른 제가 그녀를 라운지에 남겨두고 먼저 게이트로 갑니다. 제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는 노트북을 꺼내 들고 돌아가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합니다. 돌아가도 정리할 일도 새로 시작할 일도 없는 저는, 탑승 전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음료와 술을 파는 바로 가서 샴페인을 한 잔을 주문해 마십니다. 샴페인은 달고 시원했는데 왠지 마음이 조금 슬펐습니다. 같은 세계에 있던 그녀와 제가 이제는 다른 세계에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세계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기대하던 여행을 와서도 저는 종종 슬펐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는데 돌아가서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슬픈 걸까요?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작아지는 자존감 때문에 슬픈 걸까요? 이런 감정을 이 나이에 느끼려고 회사를 나온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독침을 맞아 번아웃으로 죽었으면 다시 부활을 해야 했는데, 그걸 미루고 미룬 죄 값을 이렇게 10년 할부로 조금씩 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영부영 10년이 흘렀네요.
앞자리가 4에서 5로 바뀌었습니다. 4와 5의 감각은 사람마다 다른데 저는 2와 3보다 훨씬 담담하고 3과 4보다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5와 6은 또 다르겠지요. 4의 슬픔을 딛고 5를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가 왔음을, 수시로 울어대는 슬픔이를 통해 드디어 저는 알게 된 샘입니다. '내 슬픔의 이유'는 '내가 나'를 봐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면 볼수록 초라했던 것이죠. '내 눈'에 제일 먼저 보이는 그 초라함, 퇴사 후에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그 초라함이 저를 슬프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책을 한 권 냈고 수많은 고전과 소설, 철학과 교양서를 읽었고, 그림도 제법 잘 그려낸다고 스스로에게 큰 소리를 처도, 슬픔의 트라이 앵글에 깊게 파인 주름은 펴지지가 않았던 것이죠.
감전 사고로 두 다리와 한 팔을 절단한 후에도 호스피스 환자를 보살피는 BJ 밀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뭔가 마음에 들지 않고 좌절하기 쉬운 곳에 있는가? 그렇다면 그건 아름다운 희망으로 가득 찬 곳으로 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라고요. 그 말에 위안을 얻습니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을 정도로요. 저는 지금 그곳에 있으니까요. 드디어 슬픔이가 저의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제가 희망으로 아침이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나 이 슬픔이 저에게 안겨준 방황의 시간들은 남은 반잔에 채워두겠습니다. 이 시간이 없었다면 저는 나아갈 수 없었을지도 모르니까요. 마냥 줄줄 흐르기만 하는 시간과 함께 마냥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요.
<아네고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