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선배님은 … 늘 화가 나 있는 것 같았어요" 저와 인연이 깊어 지금도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는 후배가 말했습니다. " 내가? 그럴 리가…" 저는 회의 시간에 가끔 열을 낸 적은 있었지만 팀원들에게는 화를 낸 적이 없다고 되받아치자 그는 빙긋 웃으며 말하더군요. “ 그렇긴 했죠. 제 말은 그냥 화가 잔뜩 나 있었다고요. 매 순간…”
며칠 전에 읽은 책에 의하면, 분노라는 감정은 희로애락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노를 어떤 일의 화력으로 삼으면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 낸다 고 하네요. 그 어떤 일이 되갚아 준다 는 '복수'라는 개념을 품지 않는 전제하에서 말이죠. 후배의 말을 차분하게 곱씹어 보면, 그 시절의 나의 정체성은 분노였습니다. 새로운 프로젝트에서 발생되는 문제에 분노했고, 그 분노를 참지 못해 해결책을 찾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의 밥그릇을 챙기는 사람들에게 분노했고, 그 분노를 참지 못해 빨리 승진을 하리라 이를 악물었죠. 일이 쌓일수록 연차가 쌓일수록 저의 분노는 차곡차곡 쌓여 갔습니다. 그 덕분에 일이 늘었고 단단한 내편이 생겼고 자랑하고 싶은 포트폴리오가 생겼으나, 그만큼 잘 풀리지 않은 일에 기가 죽고, 저를 경계하고 시기하는 주변인들이 생겼고, 좋은 일은 혼자 다 독식한다는 꼬리표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모두 예상하시라 생각하지만 저의 분노는 독침이 되어 번아웃이라는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뒤돌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은 앞만 보고 가야 하지만 가끔 뒤돌아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고 철학자 헤겔이 말했다지요. 백번 맞는 말씀입니다. 이제야 저는 그때의 분노가 보입니다. 그 후배의 말처럼 늘 화가 나 있던 내가 보입니다. 가엽고 애처롭네요. 저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요. 아니면 말해줘도 소 귀에 경 읽기 었을까요. 틈날 때마다 죽어라 읽었던 마케팅과 광고 책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있을 뿐이니 분노에 불을 지필 독기만 보였겠지요.
회사를 나와서 자유인이 되자 저의 정체성은 서서히 슬픔으로 물들어갑니다. 딱히 생활이 힘든 것도 아니고 외로움이 사무치는 것도 아닌 데 하루의 끝이 슬펐습니다. 나이 들어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거울을 보면 슬퍼서 죽겠다는 얼굴을 한 여인이 나를 보고 있습니다. 그 꼴에 놀라서 억지로 약속을 만들고, 오랜만에 공들여 화장도 하고, 안 입던 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지인들에 둘러 쌓여 와인잔을 기울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내 입으로 뱉는 이야기가 슬퍼서 입을 다뭅니다. 아직도 회사에 몸을 담고 있는 그들의 생활은 비슷비슷해서 누가 첫마디만 꺼내면 끝말잇기처럼 이어지네요. 저는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연신 와인만 홀짝이다가, 내일의 출근을 걱정하는 지인들이 각자의 차를 타고 사라지는 것을 배웅합니다. 내일의 출근이 없는 저는 집으로 돌아가 잠이 오지 않으면 넥플릭스의 신작이라도 한편 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카카오 택시를 호출합니다. 오랜만에 건너온 강이 아름답네요. 그러다 또 슬퍼지네요. 인사이드 아웃의 파란 머리의 슬픔이가 내 옆에 나란히 앉아 저와 눈을 마주치네요. 이왕 이지경에 이른 거 저는 슬픔을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슬픔의 파도가 크던 작던 슬픔은 슬픔이고 나는 슬퍼질 것이니 이유라도 알아야겠습니다. 당분간 아무도 만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읽던 책도 던져버리고 햇빛이 쏟아지는 공원을 걷고 또 걷습니다. < 아네고 에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