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도 저는 그녀의 코 고는 소리에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눈꺼풀이 쌓인 피로의 무게에 눌려 스르르 감김에도 불구하고, 우렁찬 그녀의 코 고는 소리는 머릿속에서 제야의 종소리처럼 크게 울렸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이 사투를 벌이며 억지로 잠을 청하는 것이 더 힘겨웠던 저는, 티브를 켜고 끄적끄적 그림을 그리며 세 번째 날을 맞았습니다. 다행히 요코하마로 가는 열차 안에서 저는 까무룩 깊은 잠이 들었고, 그 덕분에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던 요코하마의 풍경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향긋한 요코하마 카레와 소롱포도 먹고, 차이나 타운에서 그녀의 손금도 봐주었습니다. 피로엔 장사가 없다고 마지막 날엔 조금 수그러든 그녀의 코 고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저는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녀의 쇼핑을 도와주고 식품점으로 가서 제가 좋아하는 양념류와 향신료를 샀습니다. 때마침 계산대에 길게 줄이 늘어섰고, 하네다 공항이니까 금세 갈 것이라는 어눌한 생각이, 비행기 출발 30분 전에 도착하는 어이없는 실수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비행기를 놓친 우리는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하는 그녀를 위해 가장 빠른 비행기를 예약하고, 빈 자석이 없어 각자 시간차를 두고 비행기를 타야 했죠. 저는 어찌나 미안하던지, 소곤소곤 팀장에서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는 그녀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죠. 저는 호텔비를 계산하고 그녀와 호텔 방에서 캔맥주와 컵라면으로 저녁을 대신하며 그녀에게 제차 사과를 했습니다. 그녀는 괜찮다며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며 저를 다독였고, 다음날 새벽 첫 셔틀을 타고 공항으로 가 그녀를 배웅하고 한 시간에 뒤에 있을 비행기를 기다리며,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렇게 그녀와 저는 첫 번째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간 서로 억지로 못 본 척했던 모난 감정들이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우리의 관계는 변함없었으나 간간히 서로를 의식하지 않은 채 혼잣말 같은 짜증을 내는 순간들이 늘었습니다. 그 순간을 누군가 먼저 감지했을 때, 우리가 비우는 술잔의 속도는 빨라졌고, 주절주절 의미 없는 말들을 이어갔습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우리는 대화라기보다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를 무심하게 훔쳐보는 것처럼… 결국 우리의 관계는 사달이 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녀를 싫어하는 것도 그녀가 저를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그녀와 나 사이에 쓰는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3일간의 긴 연휴의 마지막 날, 집에서 뒹굴 거리는 그녀를 애써 우리 집 근처로 불러내어 초여름의 바람을 맞으며 어린이 대공원을 산책하고, 손두부집에서 막걸리와 두부를 허겁지겁 먹어치웠습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우리는 생선구이가 유명한 백반집으로 가서 팔뚝만 한 고등어구이를 시켜놓고 소주잔을 비웠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부모님이 너무 고생을 하셨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훌쩍이는 그녀에게 소주잔을 채워주고 솜뭉치 같은 고등어 속살을 입속에 넣어주며 말했습니다. “ 그래도 너 같은 효녀를 두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네. 나를 봐라. 맨날 속만 섞이고 제 생각만 하고…” 그러자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주잔을 비웠습니다. 저는 횡설수설 제가 얼마나 막돼먹은 딸인지를 털어놓고 그녀를 치켜세웠죠.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제 말을 끊으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언니는 언니가 하고 싶은 건 다하고 살아왔잖아. 그리고 지금도 그렇고…” 그 후에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로에게 몇 마디가 오고 갔고 그녀가 또 눈물을 흘렸고, 그녀를 달래다가 슬슬 짜증이 난 제가 그녀의 눈을 피하며 무심하게 말했습니다. “ 그래, 그러고 보니 너와 나는 참으로 접점이 없구나.” 이제와 생각해 보면, 제가 왜 그 시점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동안 그녀와의 사이에 느꼈던 빈틈, 그 빈틈에 대한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후 우리는 식당을 나와서 말없이 전철역을 향해 걸었습니다. 개찰구 쪽으로 뒤돌아 서는 그녀를 저는 멈춰 서서 무거운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순간, 그녀를 이렇게 보낼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마음과 달리 저는 승강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헤어진 연인처럼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한 번쯤은 그녀가 저를 향해 뒤돌아 봐주기를 바라면서요. 우리 사이는 여전히 건재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미소와 함께 말이죠. 그날 저녁 그녀는 저의 카톡도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 아침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짧은 카톡을 끝으로 그녀는 저와 인연을 끝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제 탓인 것 같아서 무엇이 미안한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수차례 미안하다는 카톡을 보냈지만 그녀는 침묵했습니다. 저는 그녀와의 마지막 날을 복귀하며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차갑게 돌아서게 했는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또 1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가끔씩 그녀가 새로 올린 카톡의 대문 사진을 보며 저도 모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훔쳤습니다. 시절 인연. 때가 되면 오가 때가 되면 가는 인연. 그녀는 그렇게 저에게 왔다가 그렇게 갔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하며 부디 그녀가 저를 떠올릴 때 아프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녀가 떠난 후로 저는 어떤 이유에서든 저와 얽히고설키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인연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다짐합니다. 누군가 오고 가든 가고 오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쉬이 마음을 내어주지 않게 되었습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함부로 네가 널 이해한다는 말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녀를 보내고 알게 된 것이지요. 흐르는 시간과 함께 그녀를 향한 그리움은 희미해졌지만 불쑥 떠오르는 그녀와의 추억은 남은 생 내내 가슴 아프게 기억되겠죠. 그러나 저는 기꺼이 그 아픔을 참아내고 기억할 것입니다. 남은 반 컵 속에 그 추억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언젠가 그녀가 다시 오기를 기대합니다. 한 시절이 끝났으니 한 시절을 새로이 시작하자고 말하며 말이죠. < 아네고 에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