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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반 컵 17화

시절 인연 2

by anego emi

12월의 도쿄는 포근했고, 날씨도 너무 좋았습니다.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고, 밤거리를 걷고, 여행 첫날의 밤이 깊었습니다 다. 혼자 자는 것에 익숙한 저는 킹 사이즈의 더블베드를 그녀와 함께 써야 하는 것이 신경이 쓰였지만, 술도 거하게 마시고 평소보다 바삐 몸을 움직이고 이 만보를 훨씬 넘게 걸었으니, 누우면 바로 기절하듯 잠이 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샤워를 하고 맥주 한 캔으로 오늘을 복귀한 후, 그녀가 먼저 잠이 들었습니다. 전 티브를 켜고 유학 시절 즐겨 보던 심야 오락 프로를 보며 남은 맥주를 비웠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작은 호텔방을 떠나갈 듯 크게 코 고는 소리가 티브 속 웃음소리에 장단을 맞추듯 터져 나왔습니다. 취기와 피곤한 몸에 반쯤 감기던 무거운 눈이 저도 모르게 커지고, 점점 그 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머릿속에서 잠을 쫓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억지로 더 비웠지만 잠이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뜬 눈으로 꼬박 밤을 새우다가 어스름 속에 밝아오는 새벽하늘에 멍한 눈을 고정한 채, 멀리서 울리는 첫 차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피곤했지만 애써 미소를 짓고, 달뜬 그녀의 외출복을 함께 골라주고, 제법 이른 아침 시간에 호텔에서 나와 두 번째 날의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저와 달리 숙면을 한 그녀는 에너지가 넘쳤고, 평소와 다르게 웃음과 질문이 넘쳐났습니다. 점점 무거워지는 머리를 수시로 흔들며 졸음을 이겨내던 저는, 이어지는 그녀의 질문에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츠키지 시장에서 초밥과 맥주를 마시고, 그녀가 좋아는 굴 구이와 게 다리 구이도 먹고, 시식용 어묵과 계란말이로 마무리하고, 긴자까지 걸어갔습니다.


긴자에서 제가 좋아하는 문방구점에 들러 지인의 선물을 샀고, 문구류에 별 관심이 없는 그녀는 제 옆의 그림자처럼 따라 걸었죠. 긴자에서 타코야끼와 하이보루를 마시고, 라면을 먹고 싶다는 그녀를 위해 신바시의 골목을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가고 싶은 가게를 골라보라 했죠. 신바시는 서울로 치면 신사역 사거리와 비슷한데, 작장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오래된 노포와 맛집이 많고 맛과 가성비로 도쿄에서 뒤지지 않는 곳이죠. 라면집이 줄줄이 이어지는데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습니다. “ 언니, 라면 집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저건가? 저 간판에 쓰인 글자가 라면이야?” 줄곧 그녀가 쏟아내는 질문에 친절하게 답을 하던 저는 그 순간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들며 애써 누르던 짜증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서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본어인 ‘라면’ 쯤은 그녀가 거뜬히 읽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대답이 송곳처럼 튀어나왔습니다. “ 라면이잖아. 이 정도는 알지 않아?” 하고 말이죠. 순간,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습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저는 얼른 사태를 파악하고 그녀의 팔짱을 끼고 라면집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 그녀에게 식당의 마스터에게 들은 라면에 관한 긴 설명을 쏟아내고 주문을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라면은 너무 맛있었고, 사이드로 주문한 교자도 육즙이 넘치는 게 차가운 맥주와 찰떡궁합이었죠. 맛있는 음식과 술에 기분이 조금 풀린 그녀는 다시 웃기 시작했고, 이다바시의 좁은 골목의 와인바로 행했습니다. 간단한 일품요리와 차가운 화이트 와인이 우리 앞에 놓이고, 몇 번의 잔이 오가자 취기가 오른 그녀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아까 제가 한 말에 대한 서운함이 터져 나온 듯했습니다. 그녀는 언니가 뭐든 물어보고 자신만 믿으라 해서 그렇게 한 것인데, 언니의 말이 너무 차갑고 낯선 사람 같아서 상처가 되었다고 했죠. 저는 미안한 마음에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그녀를 토닥였고,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이끌고 도쿄타워가 보고 싶다는 그녀를 위해 막차를 탔습니다.


다행히 그곳에서 호텔까지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고, 실컷 도쿄타워를 보고 그녀와 함께 서둘러 돌아와 잠을 청하고 싶었죠. 저와 달리 마음도 몸도 긴장이 풀린 그녀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주사를 부리며, 도쿄타워를 향해 마구 돌진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여행 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멈춰 세워 사진을 찍어주고, 한잔 더 하자는 그녀에게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호텔에서 마시자고 달랬죠. 그런데 그녀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아직 영업을 하는 오뎅 바에 불쑥 들어가, 카운터 좌석에 자리를 잡고, 종업원이 내민 메뉴판에 그려진 어묵 세트와 맥주를 호기롭게 주문했죠. 무표정한 종업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어묵과 맥주가 서빙되었습니다. 그녀는 국물이 거의 없는 어묵 그릇을 뒤적이며 국물이 왜 없냐고 투정을 부렸죠. 저는 일본은 어묵만 먹지 국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말해주었지만, 그녀는 다자 꼬자 국물을 더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사그라들지 않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저는 마스터에게 한국인들은 어묵에 국물이 없으면 낯설어하니 국물을 좀 자작하게 달라고 부탁을 했고, 묘한 표정을 짓던 마스터는 미소를 지으며 넉넉하게 국물을 추가로 가져다주었죠. 그녀는 그릇을 한 손으로 들고 크게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며 또 국물 맛이 짜다고 인상을 쓰며 말했습니다. 슬슬 참을성에 한계가 올 무렵,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고 종업원이 계산서를 내밀었습니다. 계산을 하고 나오자 다시 도쿄타워로 가겠다는 그녀에게 저는 단호하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 그만해. 이제 그만해. 왜 이러니? 안 하던 짓을 하네…” 제 말을 알아들었는지 한풀 꺾인 그녀는 나와 함께 호텔로 향했습니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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